1. 예수님은 소경되었다가 나은 자를 다시 만나셔서 그가 진정으로 눈을 뜨는 자가 되게 하셨다.
이 세상에는 소경이었으나 눈을 뜨는 사람이 있고 눈을 뜨고 있었으나 소경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한 편은 점차 좋아지는 사람이고 다른 한 편은 점차 나빠지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바로 그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소경이었으나 눈을 뜨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35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는 단지 눈만을 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뜸에 대해서 증거할 때에도 분명하게 선지자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에게 따라 나타나셨고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사실 그는 보아서 믿은 자가 아니라 보지 않고서도 믿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믿음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는 자가 믿음을 보지 못하게 만드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경된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고통중에서 진정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러한 자가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믿고 나서 진정한 삶에 대한 이해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을 믿으면서 바로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러한 유익을 누리고 있다면 주님이 원하신 바로 그 유익을 온전하게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주님의 심판하심과 판단하심이 소경된 자는 자신의 소경됨을 고백하고 눈을 뜨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3. 이 모든 것이 거짓과 위선과 속임수로 가려져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진실을 밝히 보여주신다.
이제 문제는 끝까지 거짓과 위선과 속임수로 일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판단하심을 거부하기 때문에 더욱 소경이 되어갑니다.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만약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오면 주님은 그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끝까지 부인하면 결국 그 죄에 대한 죄값을 달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범죄 피의자가 자수하면 죄를 경감받지만 끝까지 도주하다 잡히면 가중처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4. 우리는 소경된 자들이었으나 더욱 눈을 뜨는 자들이 되어서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소경입니까, 아니면 눈을 뜬 자입니까? 우리는 소경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완전히 눈먼 자입니다.
이제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통해서 그 선을 추구할 때에 비로소 소경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최악의 기후 속에서 비행할 때에 절대적으로 계기판을 의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각을 믿지 않고 계기를 믿을 때 비로소 안전한 비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궁극적인 절대 선이신 예수님 앞에서 그 말을 부인하는 자가 되어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그 말씀을 잘 따라서 참으로 앞을 보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