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천국잔치의 비유가 있습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올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초청한 임금의
신하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그들을 진멸하고 심판한 뒤에, 청한 사람들이 아니라 길거리에게 오가는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에는 청한 사람들은 오지 못하고, 대신 길거리에서 불러 모은 사람들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끝입니다. 이것으로 비유는 끝이 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처음 청함을 받았던 자는 사라지고, 대신 불러모아진 사람들로 천국 잔치 자리가 가득 차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처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완전히 배제되고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읽을 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으면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같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복음서의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전편을 보지 못하면 후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소설에서 1권을 읽지 않고서는 2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2. 시기나는 것이 열심으로 내는 것으로 변화되게 하신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여기서 ‘저희’는 처음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바로 대신 부름을 받은 사거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족함이, 그들의 넘어짐이 오히려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르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복음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실족하여 넘어짐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이스라엘이 시기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왜 이스라엘이 시기가 날까요?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대로
섬기던 자요, 그리스도께서 자기 민족중에서 난 자들이며, 언약과 율법과 주를 섬기는 예법이 있는 자들인데, 지금은 이방인이 도리어 그 믿음에 있어서
진보가 되며 앞서가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구원에 있어서 예외가 되고 해당사항이 없었다고 생각한 자들이 이제는 구원의 첫열매가
되고 귀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시기가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단지
시기를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이방인을 따라 구원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골육인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만드는 이유는 그들 중 얼마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시기가 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과 교만과 강퍅함때문에 이렇게 시기를
나게 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 앞에 머리를 꿇지 않았을 것이고, 겸손하게 죄사함을 받으러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에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라고 자부하며 자랑하였으나, 그러한 교만을 주께서는 꺽으시고 이처럼 시기나게 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구원을 간구하는 자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3. 은혜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 낮추시며 바라게 하신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기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천국잔치에 처음 초청받은 자들이 거부함으로 그대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시 시기나게 하여 구원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또한, 15절입니다.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 두 구절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이미 택함을 받아 그 복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더 큰 기쁨과 충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저희의 충만함은 세상의 넘치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저희의 버림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면, 저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의 부활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시기하도록 자극을 받아 다시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먼저된 자를 낮추신 뒤에 나중 된 자를 높이시고, 다시 먼저 된 자도
버리지 않으시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인 것입니다.
4. 우리는 결국 은혜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기함의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시기함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시기가 나서 구원에 이를찌라도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아도, 아직도 끝을 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집착이요 열심이요 정열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끈질기게 부르시는가. 얼마나 끊임없이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부르시는가. 그것이 때로는 따뜻한 음성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때로는 화나게 하고 분하게 하며 슬프게 하고 시기나게 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백성을 오늘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포기해 버린 영혼을 주님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기하도록 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좀 더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는 자들을 부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