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ㅇ)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ㅈ)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ㅌ)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ㅋ)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1. 하나님은 사람들을 기다리신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는 시내버스에 차장이 있었습니다. 이 차장은
버스에 타는 승객들을 위해, 빨리 버스에 타도록 밀기도 하고, 독촉하기도 하고, 요금을 받기도 하면서 버스 운전사를 돕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커다란 버스 한 대와 운전수, 그리고 차장이 있습니다.
이 버스의 행선지는 천국입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인도할 운전사와 사람들을 이 버스에 타도록 돕는 차장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몇몇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지났습니다. 이제 차장은 문을 탕탕 두드리며 말합니다.
“오라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전사는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차장은 운전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오라이! 다 탔습니다. 출발하세요~”
그런데도 운전사는 여전히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장이 운전사에게
와서 묻습니다. “출발 안하세요?” 그러자 운전사는 대답합니다.
“아직 타야할 사람들이 더 남아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말씀하시고 그 때가 되면 모든
구원의 문이 닫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약속하신 이래로, 많은 주의 종들이 끊임없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 오십니까?
아직도 주님의 때는 멀었습니까?” 그리고 그 때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기다려라 아직 구원받을 자들이 더 남아있느니라”
주님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본 말씀에서 나타난 것처럼 믿음은 단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들은 그저
듣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믿게 하는 것에 좌절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들려주는데에만
촛점을 맞추도록 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없이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어떤 면에서 믿음에 촛점을 맞추시지 않고
단지 들음에 촛점을 맞추시는 주님의 모습은 다소 매정해 보이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말씀은 사실은 그들을 위해 한없이 기다리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신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 손이 무안하게 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 손을 뻗쳐 순종치 않고 거스리는 백성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창피하지 않으셨을까요? 무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구원받지 못한 그들을 위해 늘 그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게 손을 벌리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가셨습니다.
“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주님은 그들이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그들이 찾은 바가 되셨습니다. 또한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르지도 않았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왜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아가십니까? 왜 문의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내십니까? 주님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환영받지 않는 자리에 나아가시는 주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종일 손을 벌리시면서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로 간절히 그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치 집을 떠난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아버지와도 같이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절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그 손을 펴고 계십니다. 구원의 문을 닫지 않습니다. 오늘도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아갑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정말로
마음아파하시는 것은 그들의 멸망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파괴당하는 것입니다. 심판자이시면서 주님은 심판받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때문에 구원하고자 하신다.
요나가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구원하심에
대해 내가 성내는 것은 심지어 내가 죽기까지 할 지라도 합당합니다!”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주님은 참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를 멸망시키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십이만여명과 그들과 함께 있는 많은 육축들을 쓸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들을 기다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종일 팔을
벌려 그들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쓸어버리신다고만 알고 있지, 정말로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출발해 버리기를 원합니다.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시냐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아 기다리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심이고, 그들이
당하게 될 심판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의 기다림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자.
때때로 조바심과 낙심속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손 내밀기를 포기해 버리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시기나게 하여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까지 주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인내가 다하였다고 말하지 말고, 도저히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주님의 인내를 깨달아 여전히 주의
손과 발과 입이 되어 전도의 문을 열어놓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함께 기다려야 합니다. 함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종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단순한 하나님의
종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종이 깨달을 수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변화되어지는 모습입니다.
그 기다림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오늘도
함께 기도할 때에 그분을 닮아 여전히 기다리는 자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