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징계하였고,
이일로 인해 삼천명 정도가 죽임을 당하는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진노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는 모세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뿐만아니라,
백성을 위해 간구하였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이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모세가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주권과 그분의 선하신 뜻이 그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승>
여기에 바로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본문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받는 은혜와 긍휼히 여김에 대해서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말미암았다고 하는 이유는 은혜가 은혜되기 위함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값없이 받은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받은 은혜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보십시오.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하고, 댓가가 됩니다. 인간이 마땅히 투자하고 드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땅한 보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은혜는 오직 은혜일 뿐이지 결코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댓가가 아닙니다. 은혜는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간청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바라보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뒷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앞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지나시고 난 다음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나 놀랍고 나타나며,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뒷모습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출애굽기 33장 19절의 말씀 다음에 20절부터 23절에 나옵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
바로의 예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는 어떠한 자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학하게 다스렸으며, 무거운 짐을 지웠고, 종으로 삼아 부역에 종사하게 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였으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였던 자입니다. 그러한 바로의 강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도, 열 가지의 재앙이
끊임없이 닥칠 때에도 그는 그 고집과 강퍅한 마음을 꺽지 않았던 자입니다. 비록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비로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었지만, 다시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민족들을 다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쫓아나왔던 자입니다.
이러한 자가 바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나간 일들을 다 생각하고
난 뒤에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뒷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퍅한 바로에 대해 하나님은 당황해 하지 않으십니다. 저지당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의 계획이 꺽이지도 않고, 그분의 구원하심이 약화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바로를 그러한 강퍅한 상태로 되도록 만드셨다고 하십니다. 이부분이 중요한데, 하나님은 강퍅하지
않은 바로를 강퍅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강퍅해진 바로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개입하심을 뜻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장악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강퍅해진 바로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심이었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상황을 방관하시거나, 무관심하시거나,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분이
아니시라, 그 모든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관장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바라보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하나님의 뒷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결>
바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온땅에 전파하십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일을 폐하고자 무던 애를 썼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통해 영광받으시며, 승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진실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은 칼빈주의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만, 그것은 칼빈주의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아 모든 것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