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 속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목표와 방법과 계획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다가 나온다는 것은 그 목표와 방법과 계획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어서
어떠한 사람들 속에도 포함되어있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아무하고도 어울릴 수 없는 것은 결국에 스스로의 생각과 결심
대로만 움직이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이것은 스스로 나뉘이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더 나은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소욕을 따르기 위함이며 그로 인해서 여러가지 참된 지혜를 배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여기서
온갖 참 지혜라는 부분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옳은 지혜는 아닐 수 있지만 일반적이면서도 바람직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에 관한 모든 경구는 이러한 지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런 지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에 우리는 그 의미가 자신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스스로 자멸하는 것 뿐입니다.
2.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리 속에서 나뉘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와 의를 지킬 수 있을까요? 사실 나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입니다. 나뉘지 않고 스스로 지키고자 한다면 온갖 어려움과여러가지 지혜를 쥐어 짜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여기에서 보여주는 몇
가지 지혜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악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선적인 지혜로움입니다. 결과와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만을 나타내는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결과를 생각하며 이후에 따르게 될 영향력에 대해서 심사숙고합니다.
그러면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4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주님의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깊은 물처럼 혹은 솟쳐 흐르는 내처럼 메마른 땅에 지혜와 명철을
내놓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명이고 그러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을 통해
어떻게 샘솟는 듯한 지혜를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남의 말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추구하더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자꾸 옮기다 보면 스스로 올무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배제하기
위해서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8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데로 내려가느니라”
이러한 자들은 자기자신을 위해서 말할 뿐입니다. 그것을 좋아하고
피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뱃속 깊은 데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영혼의 깊은 곳까지 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자제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삼하 18장에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고하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요압은 왕의 아들인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으나 그 승리의 전보와 함께 압살롬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왕을 슬프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히마아스가 승전보를 알리고 싶었으나 알리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만 어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사숙고해야 하고 사려깊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제 세 번째는 무엇을 추구하느냐입니다. 의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달려가서 그곳에서 안전함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정의를 위해 나아가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보다 더욱 우선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집단과 조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소욕에 의해 희생될 뿐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 속에 머물러있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로움과 명철함으로 어리석은 행동과 섣부른 말을 조심하면서 노력해 나갈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115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시115:1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이러한 겸손함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왕도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온전한 왕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11장입니다.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울왕이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셨다고 고백했을 때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그가 질투심으로
눈이 멀었을 때에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겸손함 속에서 선한 행실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선한 무리에게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이며 올바른 삶을 통해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는 자가 되는
길입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