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2: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두었고
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42: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42: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42:16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1. 욥이 시험을 통해서 얻게 된 것
욥은 고난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험난한 삶을 살았고, 괴로움을 많이 겪었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또한 누구보다도 의로왔고 그 의로움이
모범이 되어서 성경에까지 기록된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욥의 고통과 고생은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서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가 그냥 고통속에서 그 인생이 마쳐졌다면, 너무나 허무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수치를 씻어주실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해 주심으로써 그는 고난을 참고 견디는 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후에 찾아오는 축복과 보상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 오해는 과연 욥이 두배로 축복을 받았다고 해서 정말로 행복해졌느냐라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 이미 욥은 부자였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고 양이 칠천,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겨리, 암나귀가
오백이었고 종도 많이 있었으며, 동방 사람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이러한 욥이 고난 후에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같으면 두 배의 축복은 받지 않아도 좋으니, 고난없는 삶을 사는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큰 축복은
바라지 않을 지라도 단지 먹고 살만큼의 행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욥이 받은 축복이나, 그 축복을 받기까지의 고생 등은 쓸데없는
수고였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욥의 생애는 아무 의미없는 삶을 산 것일까요? 그가 고난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과 은혜가
고작 이전에 있던 것의 산술적 차원에서의 갑절의 의미만을 갖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전부이었겠습니까?
2.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회복과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욥에게 있어서 두배의 축복이 의미하는 것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이것으로 그의 고통과 고생을 보상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받으신다는 것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가 받은 고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의 순전한 신앙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아내가 그를 욕하고, 친구들이 그를 죄인으로
몰아붙이는데 그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호소하였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 표시가 바로
두 배의 축복이었습니다. 이로써 욥의 신앙은 옳은 것임이 드러났고, 하나님께 대해 진실한 믿음을 가졌던 그의 신앙은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배의 축복은 단지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욥을 완전히 인정하심이며, 사랑하심이고, 축복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욥의
모든 고난과 괴로움은 또한 완전히 기억되지 않고, 사라지며, 위로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통해서 더 큰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축복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42장 5절 말씀입니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3. 욥은 하나님의 뜻으로 고난을 받았고 승리하였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편하고 잘살때는 그렇게까지는 알지 못했던 주님을, 고난과 괴로움속에서
공의과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고난중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결코 평안할 때에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욥의 고난은 아무 의미없는 헛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만유위에 운행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이전 모든 소유의 두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고난을 통해서 생겨진 것들입니다. 이것은 시편119:71에서도 동일하게 증언되는 것입니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렇게 까지 욥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한다 하고나서,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욥이 고난을 받게 되었는가라는 것입니다. 욥은 그가 고난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난의 삶으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고난을 받았지만,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뛰어들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당면한 고난을 이겨내라고 하십니다. 현재 자신에게 고난이 있다면, 이를 끝내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고난의 통로 끝에
하나님의 광명한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끝까지 인내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의 연단을 잘 감당하는 자들이 되자.
고난 속에 미혹되어 넘어지겠습니까? 죄짓겠습니까? 고난 중에 주님을
부인하고 불평하다가 자신의 죄로 통과하지 못하고 낙오하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욥의 결말을 기억하고 인내로 지키어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고 단련시켜서 든든한 하나님의 군사로 세우시고자 하시는그분의 귀하신 뜻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