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유업이 미래의 약속이었다면, 그 아들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유업도 마찬가지로 미래의 약속이었습니다. 미래의 약속의 규모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함께 연결되어서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유업은 단지 아브라함의 유일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약속은 이삭에게 물려지고,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요셉에까지 연결되어 그들이 바라는 바 영원한
유업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미래의 소망을 동일하게 이삭, 야곱, 요셉도
바라보면서 그 약속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시리라는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살았고, 그 땅을 바라보며 죽었으며, 그 땅을 바라보며 그곳에 묻혔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바라보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받기로 한 유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는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별과
같이 많은, 모래알과 같이 많은 자손들이 받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 바라보며 살았던
그 영원한 유업과 그들의 받은 약속, 그리고 그 소망을 함께 살펴보면서 겨우 한평생을 살면서, 바로 코앞의 소망만을 바라보려고 하는 자신들을 다시 한번 성찰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잘 아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로 인해
요셉의 모든 가족들은 애굽에 이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청을 받아 애굽으로 이주할 때에, 그의 마음은 편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유업이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간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서 3대가 살면서 그 약속의 유업을
바라보며 이때껏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땅을 버리고 이주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마음을 잘 아셨던 주님께서는 친절하게도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하나님께 가지고 계신 놀라운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창46: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46: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 애굽에서 커다란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만을 내려보내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내려간 애굽에서 다시 그를 인도하여 이 땅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 품에 안겨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약속을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왔고, 약속을 바라보며 역시 평생을 살았던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았던
야곱에게 애굽으로의 이주는 커다란 망설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과연 이 땅을 버리는 것이 옳은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고, 현재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중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약속을 변치않고
소망하는 자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확증인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알지 못할 때, 이것은 완전한 실패다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절망과 낙심과 패배와 좌절로 약속은 깨어지고, 유업에의 소망은 끝이났다고 비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까지
같이 내려가십니다. 그들만 애굽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쫓겨가는 것같아도, 겉으로 보기에는 소망이 사라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끝내 그 계획을 이루십니다. 야곱은 혼자서 애굽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내려가는 것이며, 이방 땅, 온갖 잡신들이 뒤끓고 있는 그 우상숭배의 나라에서 비록 굴욕스럽지만, 자신의
사랑하시는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을 잊지 않았습니다.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유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야곱은 애굽에 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는 아무도 사는 자가 없습니다. 연고도 없습니다. 살 계획도 없습니다. 모든 식구와 가족과 후손들이 이 땅 애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갈 날이 오리라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는 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 만드셔서 가나안이라는 땅을 약속대로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죽을 때에 말하기를, 애굽 땅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묻힌 그 땅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합니다.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자신의 마지막을 약속중에 거하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49: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49: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49: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의
마음은 언제나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보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의 유업을 물려준 조상들이 묻혔습니다. 이제 자신도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할 때에, 그 약속의 유업을 함께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그 땅에 묻힘으로써 하나님께서 언젠가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땅을 소망하였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분명했습니다. 언젠가 그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그의 몸이 뉘여 있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이름으로 일컬어 지는 민족이 되어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자신의 몸 밖에 뉘일 수 없었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가나안에 미련을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곱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그 약속의 성취를 소망하는 자들, 비록 바란 것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여전히 그것을 사모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애굽에 묻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이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던 요셉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뼈를 애굽에 묻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뼈는 결국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주실 가나안이라는 유업을
소망하는 자들은 전부 그 몸을 애굽에 묻지 아니하고 나중에라도 꼭 그 몸을 가나안에 묻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바라본 자들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말합니다.
세겜으로
옮기운 자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겜으로 옮기워 그곳에서 장사되었다는 이 동사는 복수형입니다. 여러 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조상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자들입니다. 약속의 유업을 소망하였던 자들입니다. 실제로는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볼 것을 기대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뼈를 가나안이라는 곳에 묻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소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있는 약속의 유업은 무엇입니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유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유업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유업, 약속의 유업을 위해 우리 자신의 뼈를 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업을 위해 우리 자신의 뼈를 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타협하여 이 세상에 나의 뼈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버리셨다고, 혹은
잊어버리셨다고, 혹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라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래서 내 자손을 위해서 우리는 신앙의 유업이라는
뼈를 묻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약속하신 유업을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 유업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평생을 아니 대대로 이어 내려진 거대한 유업임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 나라에
묻혀진 믿음의 뼈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의 뼈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 유업을 오늘처럼 이렇게 축복되게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들의 희생과 믿음의 뼈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이렇게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들 각 사람의 차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업을 위해 우리의 믿음의 뼈를 묻을 때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는
소망을,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그 소망의 실현을 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유업, 이삭의 유업, 야곱의 유업, 그리고 요셉의 유업.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유업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나의 유업. 보이지 않는 실현된 것을 볼 수 없는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내
뼈를 묻어야 하는 이 진실한 유업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게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