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7: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 하셨으며
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7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7: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스데반은
사람들에게 끌려 공회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거짓증거로 스데반을 고소하였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이 말하는 것은 성전을 모욕하는 것이고, 율법을
멸시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율법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 왜 자신들에게 그러한 심판이 임하고 고통이 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
잘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 성전과 율법에 대해 거스리는 말을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말한 것은 단지 성전과 율법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말한 것이 성전과 율법이라고 하는 그들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대한 파괴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성전과 율법에 대한 도전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낱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과 율법에 관해 스데반을 고소한 것은 사실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여기에는
성전과 율법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사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던 예수님
자신이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돌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었으며,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무리들은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당연한 사실을 죄로 삼아서 예수님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결코 죄가 아닌
것으로 인해 예수님은 정죄당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도 그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은 성전과 율법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정죄함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모두 사실이냐?”
이제 스데반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성전과 율법에 대한 파괴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으로부터 내려오는 그들 자신의 역사속에서 드러나는 믿음과 구원의 원리, 그리고 그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기나긴 해석과 설명에서 스데반은 가장 처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처음 보여준 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믿음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유업의 약속도 주어졌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약속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이전에 있던 것입니다. 할례의 율법보다도 믿음의 언약이 훨씬 앞선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받았던 믿음의 언약은 무엇일까요? 본문 5절 말씀에서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 하셨으며”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처음의 거주지는 척박한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믿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났는데, 왜 도착한 곳에서 만난 것은 척박한 땅이었을까요?
또한 스데반이 말하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게된 가나안에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얻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로 돌아가 좀더 자세하게 아브라함이
당한 형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입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분명, 하나님의 뜻으로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시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약속은 받았지만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첫 관문이었습니다. 주시겠다 하나 당장은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스데반이 말한 것입니다. 저와 저의 씨에게 이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어 사백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이 땅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성취는 무려 사백년 후의 일로 잡혀졌습니다. 분명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낳지도 않은 자손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일이 완전히 이루기까지는 4백년
아니, 그 이상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한 증표로서 할례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대대로 할례가 시행됨을 통해 그들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언약이었습니다. 할례는 단지 표증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억나게 하는 것뿐입니다. 실제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 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동일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은 믿음장으로서 믿음의 선진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중 아브라함에 관한 것을 같이
보겠습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거하였으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이 다시 동일하게 나타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는
나갔고,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비록 약속의 성취는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루실 일을 바랬습니다. 소망했습니다.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함으로 나간 가나안에서 오히려 기근으로 낭패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더딘 것일까요? 아니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왜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더디게 보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바로 코앞에 있는 약속을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을 때까지 이어지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고 하늘의 별들처럼 네 자손을 많게 하시리라는 그 약속은 그들에게 거하고 살 수 있는 땅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통해 완전히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는 내가 살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나서 훨씬 뒤라야 이루어지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약속의 스케일이 우리와 비교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이 더디게 보일 뿐이지
사실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 아브라함의 받은 약속을 말하면서, 그 약속의 대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다렸던 언젠가는 주시리라고 믿었던 그 땅, 지금은
기근으로 도저히 살 수 없지만, 나중에는 젖과 꿀이 흐르게 되는 그 가나안 땅을 그 자신과 보이지 않는
미래의 자신의 후손들에게 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 약속을 갖고 사는 자들의 삶을 규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고,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하여금 유업을 얻게 하신 분이십니다. 단지 육체적 후손들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후손들에게 믿음으로 얻는 유업을 확인시켜 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과거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자신의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언젠간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실 예수님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미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지금 당장 믿음으로 인한 변화가 없고, 어려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견디는 것입니다. 지금 방금 이주한 가나안 땅에서 비록 기근을 만났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언젠가는 이루실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기다렸던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현재의 상황을 믿음으로써
헤쳐 나가고,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제도
여러분 자신의 유업을 바라보십시오. 비록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보이지 않는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러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마침내
유업을 허락해 주시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하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사백년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왔듯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저와 여러분에게 약속의 성취로서 임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목격하든지 혹 못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