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 40: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출] 40: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우리는
기도 중에서나 말씀 중에서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많은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해달라고
간구하기도 합니다. 확실히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든든한 일입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후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를 향해서 나아간다고 했을 때에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주님을 우리가 따라 간다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거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사실은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지만 어디론가 이동을 할 때나 무엇인가 행할 때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이기 마련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따르던가, 우리가 주님을 따르던가 입니다. 과연 우리가 삶속에서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본문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름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출] 40: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출] 40: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이 구름을
따를 때 낮에는 구름기둥이요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어서 불이 구름 사이에서 비치는 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도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확실하게 하나님을 따라가는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고자 할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사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현재 머무르는 곳에서 어디론가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사하고자 하는 모든 장소를 다 선택해 놓고 계약까지 다 해놓고 나서, 하나님께 이 장소로 옮기는 것에 함께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느 장소로 옮기는 것을 원하십니까 기도하면서 그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이사하십니까? 무엇이
먼저입니까? 여러분이 결혼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결혼
상대자를 여러 가지 조건과 만족에 맞추어 다 결정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그 사람과의 결혼을 축복해 주옵소서, 그
가정에 함께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까? 아니면, 먼저 그
사람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응답을 발견하고서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나서
결혼 과정을 진행시켜 나가십니까? 이러한 원리로 집을 팔거나 살때, 직장에
들어가거나 나올때, 사업을 시작하거나 끝을 낼 때, 그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하고 한번이라도 생각하며 기도하고나서 일을 행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모든 일을 다 해놓고 나서 하나님께서 뒤처리를 해주시기를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지 우리가 해놓은 일을 하나님이 따라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어떤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따라서 행하려고 노력하는 분이었고, 좋은 믿음의 본을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보여왔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분과 이야기하다가 전혀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것이 대화의 주제였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결정을 하고 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고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허락하실까 아니면 허락하시지 않을까, 기뻐하실까 아니면 기뻐하시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에 소원이 생기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을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단지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있어서 생각보다 훨씬 무지한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며 자기의 결정이 곧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따라오시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오해와 무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어리석음에 거하지 않도록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깨달으며, 어떻게 순종하는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말해서 가라하면 가고 머물라하면 머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나안은 아무도 지리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도저히 안내하는 자가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세
자신도 어떻게 가나안에 도착하는지 그 길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오직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진행규칙은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출발하여 나가는 것이었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그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에 떴지만, 밤에 이동하지는 않았으니까 오직 구름만 보고 그들을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가나안으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야 성공적으로 갈 수 있는가는 애초부터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면 우리도
가고, 하나님께서 머물러계시면 우리도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음 신호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전진신호는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구름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 신호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꿈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응답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주변의 환경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의 확신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신앙의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쳐다보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뜻을 알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간구했던 이유는 그 뜻이 바로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타나던 하나님의 영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 40: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출]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그래서
그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고 구름을 따라가는 동안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편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편에 주님이 서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절대로 주님의 편에 서지 않으면서 주님이 내편이라고 우긴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은 결코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면서 주님이 나와 동행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인 것입니다. 여기서 동행한다는 것과 감찰한다는 것은 커다란 차이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죄의 길로 갈 때에 주님은 우리를 굽어 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동행'이 아니라, '감찰'인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와 책망을 위한 '감찰'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속에 있는 그 모든 변화와 이동 속에서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입니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고, 뒤쳐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 바로 뒤에서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모든
삶이 평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