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행]14: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행]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행]14: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행]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행]14: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행]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우리의
삶에서 복음의 일들은 한번 해버리고 나면, 다시는 할 필요 없는 일들이 아닙니다. 과거에 전도를 한 두번 했다고 해서, 지금 다시 전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복음의 일들은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주를 위해 했던 일이 있었다면, 지금 현재에도 또다시 주를
위해 할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변함없이 가져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의 모습은 왕년에 몇 번 해 보았다고 해서 완성되거나 졸업하거나 다 끝나버린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항상 반복해서 일어나야 하는 우리들의 본분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 14장은 앞장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다시 반복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어떠한 모습을 보였던 자들이 다시 현재에 그 모습을 여전히 나타내고 있는 부분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복음 전파의 열심을 보였던 사도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그 복음 전파의 열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심을 품고 일한 것에 대한
반응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우리는 그러한
두 가지의 극명하게 대립되는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행]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행]14: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러한
두 가지의 반응은 과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악감을 품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부딪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한 반응에 대해
사도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가가 중요합니다. 3절입니다.
“[행]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의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그들의 말씀 증거의 힘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합니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말과 방법과 기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주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힘, 주님이 주신 표적과 기사, 주님이 주신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놓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내 힘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내가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주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주님이
주신 능력을 통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의 힘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힘은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할 만할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굴곡이 있고 중단될 때가
있으며 고조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내 힘에 더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어떤 일을 이루었지만, 그 이후에 내 힘을 의존하게 되면서 다시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위를 걷던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물 위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막상 걸을 때에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바다 위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발밑의 검은 파도가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검은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도와
봉사와 섬김과 모든 주님의 일이 그렇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말씀을 주셔서 시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다고
곤경에 빠졌다고 열매가 없다고 중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했던 것은 과거의 경험이 되어 버리고, 왕년에 내가
그랬지 정도의 추억이 되버리는 것입니다.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팔짱을 끼게 되고 관망하게 되고 선뜻 나서지 않게 된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처음의
모습을 다시 가져야 합니다. 처음 그 때의 설레임과 열심과 하나님께 대한 순수했던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했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의지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서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며,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어려움은 상존할 수 있습니다. 애써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였지만,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비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기대어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은혜로운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관원들은 그들을 능욕하였고,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사도들은 부리나케 도망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떠나 루스드라와 더베 근방으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그 도망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다가 문제에 부닺쳐 꽁지 빠지게 걸음아 날 살려라식의도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도망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더 열심히 주의 일을 이루기 위한 도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8절로서 끝이나고 있습니다.
“[행]14: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행]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우리는
완전히 도망간 것은 아닙니까? 무서워 떠는 마음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마음으로 겁이 잔뜩 먹어서
도망한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일은 어제와 같이 오늘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를 힘입게
하시고, 주의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시며, 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지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변함없는 주님을 위해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했었던 주님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있는 주님의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나 주님을 의지함으로 어느 곳에 가서도 변함이 없는 주님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