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행]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 안디옥에 있는 복음을 받아들인 헬라인들을 가르쳤습니다. 바나바는 그들에게
무리한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고 오직 주께 붙어있을 것만을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가르치되 행위의 율법을
짐지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헬라인들은 급속하게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 자체가 오직 주께 붙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적인 가르침과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큰 무리가 주께 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바나바는 혼자서 그 무리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경교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바나바는 예전에 자신이 회개함을 증거하고 변호하여 예루살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소개해주었던
사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박해를 피해 다소로 피해있던 사울을 안디옥에 성경교사로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둘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에서 주의 손으로 이루어진 안디옥교회에서 일년동안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은 헛되지 않아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은 주변 불신자들에게서 새로운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한국 초대 교회때에 성도들이 예수 예수 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예수쟁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일년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했을 때, 그 가르침은 얼마나 귀한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성도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헛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쟁이’라는 칭호를 받는다면 그것은 명예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격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우리들이 예수님과 관계있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가르침은 헛되지 않아서 그들의 삶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가르침의 유익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종들로부터
배우고 깨닫고 그대로 따라 살아나가는 모습은 계속 이어져서 실제적인 부분에서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자원하여 자신들의 물질로 같은 믿음의 형제를 돕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때에
일어났던 상황은 천하에 크게 흉년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미 아가보라는 자가 이것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어려움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실제로 커다란 흉년이 그 땅에 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에 부딪쳤을 때,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29절을 보십시요. 그들은 자신들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힘대로
각자의 형편에 닿는 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편도 넉넉한 것이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믿음의 한 형제된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낸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성어린 도움의 손길은 29절에 나와있는 말 그대로 그들이 제자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29절의 제자들은 진실로 안디옥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열매맺는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정말 말씀을 잘 교육받고 들으며 깨달으면 뭔가 변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1년간 말씀을 듣고도 그렇게 큰 변화를
이루었는데, 우리는 1년은 고사하고 5년 10년동안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전혀 변화가 없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처럼 말씀으로 인한 변화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꼭 1년동안의 기간동안 변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5년이든 10년이든 언젠가는 말씀으로 인해 우리의 인격이 변하고 성품이
변하고 행실이 변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말씀으로
인한 변화를 얻고자 할 때에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그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나가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담기 위해서는
말씀을 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담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 자신에게
바로 이러한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가르치면서 말씀을 전하였기에,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 말씀의 자세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얻었고, 말씀의 내용을 그들의
삶속에 깊게 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0:31,
32절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그 뜨거운 열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을
소홀하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말씀은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기 때문에,
또한 늘 접할 수 있고 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소홀히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또한
내게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해서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말씀의
유익은 그 말씀을 통해 나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듣고
깨달아서 무엇에 쓰겠는가하지만, 그 말씀은 나의 이 세상에서 숨쉬는 동안 나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교훈이
되며, 또한 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게 될 기업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은 단지 언어가 아니고, 단순한 교훈이 아니고,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고, 이 말씀은 성령 하나님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감화 감동 교통케하시는 성령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이 바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귀히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그 은혜의 말씀께 여러분을 부탁하시길 바랍니다.날마다 듣는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여러분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헛되이 그 말씀을 받지 말고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귀하게 받아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지탱해 나가며
움직여 나가고 전진하게 하며 능력있게 하고 강하게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는데, 이제 그 말씀이 성령이 되어 우리 가운데 들려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늘 말씀을 귀히 여겨 말씀으로 늘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