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삼상]1: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삼상]1: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삼상]1: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삼상]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삼상]1: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습니다. 오직 그 은혜에 호소하며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서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일지라도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라 할지라도 은혜를 베푸셨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죄와 허물이 많고 어리석고 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며 그분의 긍휼히 여기심인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엉뚱한 데 촛점이 맞춰져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누구를 통해서 축복을 받고 기도를 받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신령한 사역자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면 더 은혜를 많이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 신실한 사람이 기도해주면 뭔가 좀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기도해주는 사람이 대신 기도하면 모든 일이 더 잘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에는 그런 더 신실한 사람, 경건한 사람,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무슨 영적 은혜의 브로커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안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황당한 생각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날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은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내가 기도를 못하니까 그런 분들에게 가서 기도를
부탁드려야 겠어'
'나한테는 그렇게 기도해주는 분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밖에
안되는 거야'
'그분에게 한번 기도를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텐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마땅히
의지해야 하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엉뚱하게도 사람에게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는 경우를 만듭니다.
분명 이러한
생각은 잘못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하는 사람은 만약 그 기도가 내게 합당치 않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저 기도를 한 그 사람만 유익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함께 기도하자고 했지 자신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단지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말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축복을 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의 전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엘리 제사장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삼상]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삼상]1: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그런데
엘리 제사장에게는 그녀의 기도하는 모습이 마치 술에 취한 여자 같았습니다. 한나는 자기 자신의 문제와
괴로움으로 인해 몸부림치며 간절히 기도했던 것인데 엘리에게는 전혀 엉뚱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항상 타인에게는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급박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급박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있고, 그에게는 급박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는 급박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간에는 그의 마음이 완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에게는 한나의 괴로움이 전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께
향해 있고 얼마나 간절한가를 말했을 때 그녀의 사정이 비로소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제사장은 한나를
위해서 평안을 빌어주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삼상]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 축복에
대해 한나는 온전히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나오듯이 그녀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주실 것을 믿었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어두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삼상]1: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그런데
정말 엘리의 말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한나가 믿고 간구한대로 아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는 그 가운데 단지 전령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결정이 난 것을 말해주는 자였습니다. 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해주고 위로하는 자일 뿐이었습니다. 역사하심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더욱 분명히 알게 됩니다. 기도해 주는 사람, 기도받는 환경, 기도의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을 주시고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오는데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에는 묘한 기적의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연못의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떤 환자도 그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요]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니라
[요]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런데
만약 가상적으로 그가 예수님께 간구하기를 제발 저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저 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마나 어리석은 자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올 한해 간구해야 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어떤 분위기나 상황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 분께
내가 더욱 나아가고 내가 더욱 간구하고 내가 더욱 부르짖어야 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럴 때 어떤 변화가 있고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나 상황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은혜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더욱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여 그분을 만나고 들으심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