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1: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하다
[행]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행]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행]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일을 낱낱이 말하니
[행]21: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행]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행]21: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행]21: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행]21: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행]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바울은 마침내 그토록 가고자 했던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형제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문안한뒤 하나님께서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 자신은하나님의 하신 일에 쓰여지는 도구일 뿐이었지, 모든 일을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자 듣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루살렘형제들 앞에 서서 이방인에게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자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믿는 형제중에게는 사도 바울의 존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었지만 믿는 자들 중에 특히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사도바울은 그들을 매우 분노케 만드는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 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은분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행]21: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행]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바로여기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율법에의 열심과노력을 모욕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과 철저한 생활습관을 깨뜨리는 자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변명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해 같은 믿음의형제들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아직 완전한 복음의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전파되거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갑자가 하루 아침에 평생동안 해 오던 율법에의 준수를 없앨수는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시대에서도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복음의 본질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의삶도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기의 복음이 잘못되어서 그 복음이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그러한 복음의본질과 핵심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습관과 유전에서 떠나 더욱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새로운 태도가 확립되어져 나갑니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발전이자 성장입니다. 또한 예전의 진실한 신앙모습을 후대의 신앙인들이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바래어진 신앙모습을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 회복하고 발전시켜 나갑니다.그러면 또한 이것이 하나의 성숙이고 발전이 됩니다.
예를들어 주일날 돈을 쓰는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과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고자 많은 어려움을 인내하였고 괴로움을 참아내었습니다. 저도예전에 이 율법 밑에서 많은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했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떤 것도 사먹을 수가없는 것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그나마 덜 했지만 그 이전에는 심지어 교통비까지도 써서는 안되는 것으로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철칙처럼 지켜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 속에서 단지 돈을 쓰지 않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이 더 옳다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일날 돈을 씁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본질은 바뀌지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돈을 쓰느냐 혹은 쓰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예전에도 주님을 위해서 돈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주님을 위해서 돈을 씁니다.심방을 가거나 식사를 하거나 교제를 나누거나 할 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이러한 의식은 아직은 모든 사람이 함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돈을 쓰지 않아야 하나님께 영광이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오히려 돈을 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가끔씩은 이 양자가 서로 충돌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라는 문제가 사도 바울이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다시금 제기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분명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에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그 원리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있습니다.
"[행]21: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것은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고 그러면서도 다양한 모습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에게나아갈 수 있는 원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하여 복음에 참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 안에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는것입니다.
때로율법에 집착하고 규례에 얽매이는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의를 추구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수비하고 방어하려고만 했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어 자랑스럽게 보이려고만 했지 복음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모이게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자유로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위해서 얽매여야 합니다. 때로는 율법을 지키는자들을 인해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인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그러한 율법 자체에의 충성이 아니라 복음 자체에의 충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스스로 할례의 무용론을 주장했던 자신의 말을 뒤집고 이미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를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성전에들어가서 할례의식과 및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자신은 율법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거부할만도 했지만 바울은 아무 반대없이 그대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더 많은 자를 얻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의복음에 오직 충성하기를 원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9: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그가기회주의자여서 이쪽 편을 따르거나 저쪽 편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율법 그 자체의 유무는 단순한 사람들의생활방식일 뿐이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보다 더 중요한 구원과 복음을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지금까지 해왔던 율법이나 유전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내키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직 복음을 위해살고자 할 때 내 자신의 가식과 교만과 허식들을 다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자중에는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중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우리 모두가 율법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에 더욱 집중해서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을 복음안으로 모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