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행]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행]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16: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성전세를 받는 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한 대화가 나옵니다.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선생이 성전세를 내지 않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실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 일을 알고 예수님이 베드로에 물으십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타인에게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날의 삶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이 이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었지만,
속한 자로 사심으로써 이 세상에 속해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원리를
적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 원리는 놀랍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의 원리를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날 문제에 이 원리는
어떻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먼저 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리를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에 적용한 것을 살펴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행]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디모데라 하는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가정 배경은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여자였고, 아버지는 이방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자녀인 디모데는 유대인일까요? 헬라인일까요? 이럴
경우 유대 관습에 의하면 자식은 유대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자녀는 이방인으로
봅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유대인으로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면 유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유대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 신실한 믿음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변의 믿음의 형제들도 그를
아는 자들은 전부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가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그로하여금 주의 일을 위해 동역하기 위해 데리고 가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그를 주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단지 한 사람의 제자로 남아있도록 하지 않고, 안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주님의 사역자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유대인으로 인정은 받았을 지는 몰라도 유대인으로서 해야 되는 할례는
그때까지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으로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주의 종이
되도록 하려는데, 가장 중요한 할례의 조건이 빠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디모데에게 유대인으로서 주의 종의 일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게
할 것이냐, 아니면 그 자신이 할례의 의미를 중시여기지 않던 자로서 비록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비난을
받을 지라도 그냥 끝까지 할례를 받지 않지 않게 하고, 무할례자로서 주의 종이 되게 할 것이냐의 선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속의 중요한 교훈은 ‘저희로 오해하지 않기 위하여’ 행하고 계시는 모습에 있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지만, 본래는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것을 모르는 저희에게는 예수님이 성전세도 안내는 불법한 자로 보여질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의 일차적인 원인은 바로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저희 무지로 인해서 주님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안내실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를 시켜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질이 흐려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 교훈을 자신의 문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지 자신은 디모데를 주의 종으로
삼을 것이고, 그리고 할례받지 않은 자로서 주의 사역을 감당하게 할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일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앞에 떳떳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줄 앎이러라” 이런 상황 속에서 괜히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이 거치는 것과 훼방하는 것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사도 바울은 그 시선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는 참된 헌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가 보십시오. 4절 말씀입니다.
“[행]16: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디모데는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효과적인 동역자로서 사람들앞에 설 수 있었고, 이로써 더
큰 주의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사람들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것은 한순간에는 불편할지 모르나, 그것이 지혜로움이고 그 뒤에는 더욱 평안하고 효과적인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절차를 무시한다는 것, 과정을
생략해 버린다는 것,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과 의견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 이런 것들은 지금 당장은 편해 보일 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애써서 성전세를 내시지 않고, 바울이
괜히 고생하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에는 편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편의를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더 큰 주의 일을 위해서 하셨습니다. 사람들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바울 자신도, 그렇게 할례에
대항해서 맞서 싸우던 그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따야 하는 자격을 취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없이도 얼마든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포기해 버리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고려하십시오. 그런 것 다 무시하면서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더 큰 주님의 일을 위해서 입니다. 더 큰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지금 나자신의 불편과 고통과 때로는 모욕까지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이와 같은 오해하지 않기 위해 규례를
지키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의미를 지키며 살려는 노력이 날마다 경주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