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행]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을 하면서 서로 다투고
갈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하는 일군이 혹은 교회가 갈라지는 아픔처럼 큰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같은데, 그리고 성도들은 서로에게
형제와 같은데 이 교회가 둘로 혹은 셋으로 쪼개어진다는 것은 어머니가 쪼개어지는 것이고 형제가 쪼개어지는 것입니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교회 분열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교회가 갈라서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였던 교회가 서로 미워하며 갈등을 일으키더니 결국 여러 갈래로 찢어집니다. 그대로 남아 있는 성도들이 있었고,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나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각각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성도들의 아픔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커다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분열하도록 허락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교회를
연합하게 하시지 않는 것일까?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예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성도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처음 나왔다가 그냥 발길을 되돌린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자체에 유익이 없고 성도들의 마음에 슬픔만 주는 그런 교회 분열이 어떻게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러한 분열은 단지 현대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올바르며 복음의 정신을
잘 유지하고 있는 초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분열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도 사도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그들 사이에서는 의견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한번 선교여행을 떠나자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함께 떠날 일행을 결정하는 가운데 심각한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행]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문제의 쟁점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1차 선교 여행때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버린
마가 요한을 다시 기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바나바는 그래도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확실하게 하려는 성격이었던 반면 바나바는 위로하며 다독이고 용납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에 대한 처리도 바울은 다시는 기회를 주지 말고 잘라버리자는 것이고 바나바는 다시 기회를 주어 붙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견차이는 심각한 다툼을 낳았습니다. 서로간의 주장이 워낙 완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격으로부터 나온
주장은 성격차이로 빚어져 결국 도저히 서로 절충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평행선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둘은 결별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가 아닌 실라를 데리고 알아서 선교여행을 떠났고 바나바는 그렇게
주장했던 요한을 데리고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연합하여 행동하던 두 사람은 갈라섰고 분열되었으며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비록 그 길이 주님을 위한 길이었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서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과 바나바는 어쩌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로 인하여 헤어졌습니다. 이것은 바울 편에서는 차라리 나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느냐 혹은 가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의 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나자고 한 것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떤지를 알아보고자 함이었지 선교훈련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정말 제대로 훈련된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시행착오를
다시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 바나바의
생각은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바나바의
생질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바나바의 생각은 젊은 주의 사역자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러고는 하지만 주의 일을 생각지 않고 자기의 일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가 요한을 두둔하기
보다는 좀더 따끔하게 주의 일을 위해 더 준비하도록 만들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결별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인은 의견 충돌이었지만 옳은 것은 분명히 바나바가 바울의
뜻을 따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었지만 바나바는 뜻을 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애초에 계획했던 선교여행의 의도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각자
따로 따로라도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그런데 만약 한 일행으로 움직였다면 한 지역 밖에 돌아볼
수 없었을 것이지만 두군데로 다녔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 그리고 바나바와 요한은 더 많은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시작은 사람들의 분열과 불일치로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선하게 이용하셨습니다. 분열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었고 그렇게
망가지고 깨어진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뜻은 바울과 마가 요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났습니다.
“[골]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마가와 바울은 평생 원수가 되지 않고 나중에는 마가의 헌신으로
인해 바울은 큰 유익과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분열과 갈라섬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도 주님의 뜻을 위해 귀하게 써주심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분리하거나 갈라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되었더라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며 작은 사역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상황이 어찌 되었던 형편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기회가 열리던지 아니 열리던지 받든지 아니 받든지 연합하든지 결별하든지
간에 주님의 일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매사에 분열과 갈라서는 삶속에서도 성도들을 주의 일에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더욱 주님의 일에 애쓰시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