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5: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행]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행]15: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행]15: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불교유적지에는
불상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불상들은 여러가지의 부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상들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불교신앙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교신앙은 오천년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이 나간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우리의 삶에서 이세상의 삶에서 분명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순간에서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부정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해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생각을 지키려고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것과 배치가 될 때에는 하나님조차도 배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로 그러한 자들이 나타납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어진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이어집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이르기까지 거처가는 곳들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행]15: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베니게와
사마리아에서 그들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방문으로 인해서 믿음의 형제들은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때문에 이렇게 큰 기쁨을 얻었을까요? 그것은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물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 준 것도 아니고, 그들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긴 것도 아닙니다. 단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듣는 믿음의 형제들을 크게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왔다는 일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구원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공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활약하신 일들이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최대의 관심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종종 부흥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부흥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지나치게 미화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흥사들이 듣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하면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고 그 주인공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승전보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듣는 사람들은 커다란 기쁨에 사로잡힙니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인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구주시요, 아버지시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들을 증거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행]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이젠 좀 자기들이 한 일도
이야기하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이야기해도 좋을 법 한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동일한 이야기로 베니게와 사마리아에서 믿음의 형제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던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위기는 어두워졌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침울해졌을까요?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5절입니다.
“[행]15: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로 이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어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오직 은혜로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들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구원을 주셔도 우리들은 새로운 조건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주어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중에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유전과 전통과 율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던 바리새파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전과 전통을 중시하던 인간적인 습성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은혜마저도 율법으로 짐지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은혜의 햇빛이 비취이는 데 손바닥으로 그 빛을
가리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명백히 보여주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부인하며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을 성경속에서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만납니다. 아니
성경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 더 옳은 말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바리새인적인 집착과 고집과 아집 속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이들이 이렇게 반대하는데 과연 이방인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볼 때에 알게 되겠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런 자들의 의견은 포기되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무시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온전히 성취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경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로 우리 자신의 생각과 충돌하지만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부르심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집착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바로 이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행]15: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그들이
모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 모인 것이지 그것을 막으려고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따르며 그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기쁨
속에 하나님의 충만하시는 은혜가 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