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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희락] 20잠7;18-27 우리가 경계해야 할 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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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잠7;18-27 우리가 경계해야 할 희락_1

 

 2014.2.9.주.주일오전.

 

*개요:    62희락, 2관점, 2시가서, 4욕구-6결심

 

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19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20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21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23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24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25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찌어다

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우리가 희락을 생각할 때 모든 희락이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만 하는 희락이 있습니다. 희락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희락이 있고 그러한 희락이 우리를 미혹시키고 결국에는 멸망케 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악한 희락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선한 희락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희락이라도 어느 선을 넘어서게 되면 그때부터 악한 희락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종이의 모서리에 손을 베일 수 있는 것처럼 희락이 악한 희락이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파멸로 인도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나타나는 희락도 그러한 종류의 희락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얼마나 그 자체로 좋은 말입니까? 아침부터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고 저녁까지 사랑함으로 희락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현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희락하자!’ 성경말씀 속에 있는 비슷한 표현 가운데에는 좋은 뜻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이사야 2: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전부 동일한 패턴으로 우리에게 ‘오라’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 잠언 7:18절은 패턴은 동일하지만 절대로 가지말아야 할 악한 곳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희락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아보이기는 하겠지만 사실은 정말 악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먼길을 떠났을 때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19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20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21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바로 간음을 행하고자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라 우리가 사랑하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희락은 우리 삶속에서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아내가 그럴 뿐만 아니라 남편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척 즐거워보입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들은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는 안되는 사이입니다.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그것이 더 큰 희락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배우자와는 나눌 수 없는 희락을 만나서는 안되는 사람과는 나눌 수 있습니다. 허락받은 사랑의 대상과는 나눌 수 없는 희락을 바로 허락받지 않은 대상과는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변합니다. 내 생애 최고의 사랑을 만났다고, 이렇게 나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그의 배우자에게 커다란 악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악으로 정해놓으셨다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악으로 정해놓으신 것은 여러면에서 정말 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이 왜 시작되었는가 생각해 보면 바로 ‘희락’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한 희락을 원하는 한에서는 사랑하고 희락하고 연합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모든 것이 전부 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희락이 다 나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희락은 선합니다. 선한 희락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희락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12:20절을 보십시오. 

“잠언 12:20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이러한 희락은 화평을 추구함으로 얻는 선한 희락입니다. 또한 전도서 2:26을 보십시오.

“전도서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러한 희락은 하나님이 주시는 희락입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었으며 죄인에게서 모아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분명 좋은 희락, 선한 희락이 있습니다. 모든 희락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희락만이 나쁠 뿐입니다. 그런 희락을 추구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분명 희락은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였고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고 금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제 문제는 이 희락이 어디에 근거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간음, 혼전관계, 동성애 등의 경우는 그것이 선한 희락인가 악한 희락인가 구분하기가 쉽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행동이 이루어지지 않은 감정상태만으로도 이러한 선한 희락이나 악한 희락이 구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서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더군다나 복잡한 인생사에서는 이것이 단지 웃기만 해도 악한 희락인지 아니면 그렇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지 늘 굳은 표정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희락의 근원에 무엇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희락의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희락의 속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희락의 속모습, 희락의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봅니다. 22절은 어리석은 한 소년, 정확히 말하면 청년의 모습속에서 그가 추구하고 있는 희락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22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23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이 말씀 속에서 소년, 즉 청년이 추구하고 있었던 희락의 근원이 무엇인가가 나옵니다. 소가 푸주(도살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그 청년의 마음의 핵심에는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이 그 간을 뚫는 것이라는 표현되고 있는 ‘생명을 잃어버릴줄을 알지 못함’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청년이 희락을 추구하는 마음 속에 있던 근원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 근원이란 하나를 의미합니다. 바로 ‘쾌락’입니다. 그러나 ‘쾌락’이라는 욕구를 말하는 것보다 그 특징을 보는 것이 더 실감이 날 수 있습니다. 쾌락이라는 욕구의 특징은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이며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욕구가 너무나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쇠사슬로부터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쇠사슬에 매이고 생명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그 즐거움을 더 원하는 것입니다. 희락의 근원이 쾌락에 있을 때 그로 인해서 죄가 생깁니다. 그 죄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은 쾌락을 계속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더욱 추구하면 할 수록 죄가 커져서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마치 컵에 물을 부으면 부을수록 결국에는 컵의 물이 넘치는 것처럼 쾌락에 근거한 희락은 얻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마침내 스스로 망하게 되어버립니다. 쾌락에는 고통이 수반되는 데 고통이후의 쾌락이나 쾌락 이후의 고통이 이어지다가 마침내에는 쾌락과 고통이 일치되면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멸망이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밖에 나갔다가 집에 일찍 들어와 게임과 잠자는 것을 즐기다가 인간관계를 잃어버리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적인 영역에서 부부가 항상 밖으로 놀러다니는 것만을 좋아하다가 악한 다른 커플을 만나게 되어서 결국에는 파경에 이르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사람들간의 교제와 친교에만 치중하다가 불건전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정말 추구해야 하는 것은 쾌락에 근거한 희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희락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하는 바로 은헤에 근거한 희락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도서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그 희락은 하나님이 주시는 희락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희락입니다. 그 희락의 근본에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희락을 얻는 것 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희락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붙들게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희락이 선한 희락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희락의 모습을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선한 희락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요4: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양식은 바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밥이나 빵처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이 양식은 마음의 양식입니다. 마음의 기쁨, 마음의 즐거움, 마음속에서 기쁘다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 희락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지 않아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오직 잃어버린 어린 양을 구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빛에서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괜찮으셨습니다. 한낮에 우물물을 길러 나오는 여인을 만나는 것을 개의치않으셨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 다음에는 그 여인이 데리고 온 동네사람들을 만나느라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하고 제때 길을 떠나지 못하셨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과거가 그 모든 현재가 그 모든 미래가 다 예수님께는 기쁨이 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의 뜻을 행하시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래도 예수님은 전도를 하고 그 전도의 열매를 거두는 보람이라도 있었지 우리는 아무런 보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과 변화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놓고 씨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고통과 고생을 자랑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극한 형편에 이른 사역의 종착점을 보여줍니다. 다 떠나버린 제자들과 다 등돌려버린 군중들, 더욱 완악하고 강퍅해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예수님은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로마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 속에서도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 이사야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고로운 것이었습니다. 아니 극도의 고통과 괴로움을 견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만족히 여기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며 그 죄악을 사하여 주실 수 있다는 데에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데에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뻐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희락은 가장 선한 희락이었고 그속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참된 희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자신의 더 큰 기쁨, 더 큰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더 큰 죄악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모두에게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시기가 있습니다. 20대는 30대를 경험해보지 않았고 30대는 40대를, 40대는 50대를, 50대는 60대를, 그리고 60대는 70대, 80대를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가 될 때에 추구하는 기쁨이 무엇일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더 큰 기쁨을 추구하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이든지 너무나 악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시기이든지 망령된 것이며 패역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희락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누릴 때에 우리는 어느 나이이든지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가 될 것입니다. 나이가 젊으나 많으나 그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희락은 가장 선한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진정한 선한 희락을 추구하는 자가 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24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25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찌어다  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새옷을 입는 것이 중요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희락,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는 희락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악한 희락, 쾌락, 죄악된 욕심을 따라 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산 정상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산 아래의 쾌락을 그냥 지나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하는 희락을 경계하고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희락을 사모하여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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