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창]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35: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창]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2011.1.30. 주일오전
우리는 1월 한 달 동안 창조의 명령에 대해서 연속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소 지겨워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만큼 창조의 명령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해진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 명령은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나약해지지 말고 늘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줍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이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에 정말 일어나 걷는 것처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라는 말씀에 물 위를 걷게 되는 것처럼,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오라는 말씀에 다시 살아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창조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면 그 명령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명령에 대한 복종은 군인의 경우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되어졌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그 명령을 따르게 됩니다. 때로 그 권위에 복종하도록 훈련되지 않은 경우에는 약간의 정신차리게 만드는 조치가 취해지고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들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해이해지고 나태해지고 불성실할 때 하나님의 정신차리게 하심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번쩍 정신이 들고 앞으로 달라져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도 이런 정신차리게 함을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 우환을 겪게 되었습니다. 딸 디나가 밖에 나갔다가 겁탈을 당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겁탈을 한 사람은 그 땅 족속인 히위 족속으로서 하몰의 아들인 세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추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그 족속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를 했고 흔쾌히 허락한 세겜은 모든 남자들로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에게 내려가서 모든 남자를 죽였고 다른 아들들은 그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습니다.
이 일이 지역에 알려지게 되면서 공분을 사게 되었고 야곱의 집은 다른 모든 가나안 민족들에게 협공을 받아서 죽임을 당할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야곱은 맞서 싸울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런 생사를 가르는 문제 속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문제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했더라면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 자신의 편안, 자신의 만사형통을 생각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서 분노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며 멀어지게 됩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일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 속에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야곱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죄는 과거에 행했던 서원을 이루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바로 벧엘에서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약속을 깨달으면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야곱은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 아무 생각없이 살아왔던 야곱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하나님과 했던 약속을 기억하면서 비로소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세 가지의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깨달았을 때 세 가지 명령인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것을 실천하게 되었는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께 대해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가졌습니다. 그가 충만하게 된 것은 바로 예전에 약속한 대로 하나님께 단을 쌓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1절 말씀에는 이것을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예전에 그가 했던 약속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8장 20절에 나오는 약속이었습니다. 과거에 야곱이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도망갔을 때에 그 가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약속이었습니다.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분명 야곱은 자신이 절박할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보았던 사닥다리에서 천사들이 기도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처럼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사 정말로 그를 지키셨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풍족히 내려주셨으며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약속을 했던 곳의 이름은 벧엘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벧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 간구를 하여 지금 당장의 위험을 벗어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런 절박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정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아니면 여유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약속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들으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한 번의 소원성취로 그치는 마법이나 마술이 아니라 영원히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주시는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응답만 받으면 돌아섭니다. 하나님께는 약속을 지키시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 되어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일시적인 하나님만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와 욕심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나름대로는 어떤 약속을 지켰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약속의 중요한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값비싸고 얼마나 정성스러운 일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행동으로 끝내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더욱 주님께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께 지켜 드리는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문제와 어려움이 생겨도 여전히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너의 서원을 갚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의 약속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를 냅니다. 반박하면서 거부합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부담스러운 이야기 말고 하나님이 또 다시 약속을 해주시며 또 다시 축복을 주시며 또 다시 기도를 들으신다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합니다. 왜 그것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를까요? 하나님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 한 다시는 더이상 속지 않으신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할까요? 그래서 더 이상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실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도가 더이상 상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죄를 깨닫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올바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을 수 있으며 문제 해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계속 부인한다면 계속해서 문제는 더욱 악순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죄를 깨닫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충만한 마음을 고백하며 선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벧엘이 어딥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마음으로 충만해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야곱은 이 마음을 이루기 위해서 우상을 정복했습니다. 이 우상은 지금까지 사랑하며 섬기며 붙잡혀 살아왔던 것들입니다. 왜 야곱가족이 가나안에 오자마자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성에 머무르게 되었는가는 이 우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딸 디나가 세겜성의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었는가는 이 우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우상을 섬기며 그 우상을 따르며 그 우상을 원했기 때문에 야곱가족은 벧엘로 쉽게 움직이지 못했고, 딸 디나는 그 땅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냥 간단하게 벧엘로 갈 수 없으리라고 깨달았습니다. 이 우상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벧엘로 쉽사리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야곱은 온 가족들에게 선언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그들의 발목을 붙드는 이방신상을 버리게 하고 그들 자신에게 물들은 악한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하고 심지어 의복까지 바꾸면서 그들은 마음의 변화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야만 온 가족이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되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가족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여전히 이방신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온 가족을 속이는 자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버리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게는 이렇게 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모아온 이방신상과 고리를 자기가 가지고 도망가거나 숨겨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것들에 대해서 솔직하고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그것이 돈으로 하면 얼마나 값어치가 있겠으며 그것을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것을 다 세겜성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야곱은 우상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도 비로소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아프리카에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의사로서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을 치료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무슨 병인지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큰 병원을 다 돌아 다녔습니다.역시 병명을 찾지 못 하였습니다. 아내는 점점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왕 죽을 바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선교하다가 사명속에 죽겠고 결심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 왔습니다. 그 때 영적으로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선교사 부인 팔목에 걸려 있는 팔거리를 유심히 보고 물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줄로 꼰 팔찌였습니다.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병원을 세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가 준 장신구였습니다. 그는 그 것이 병의 원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는 예수믿는 이들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늘 마술을 걸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선교사 부인은 그 팔찌를 빼냈습니다. 그리고 산산조각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속에서 우리를 붙드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늦게까지 자지 않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을 늘 살찌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건강을 위협하는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공부하지 못하게 막는 집에 둔 재미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우상임을 깨달으십시오. 그것을 버릴 때 비로소 정복하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야곱은 가족들과 벧엘에서 단을 쌓으면서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거기서 그는 단을 쌓으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6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미국 속담에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빗대어 우리는 이런 속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올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 은혜를 경험하게 만들 수는 없다라고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교회에 데려올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교회로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이웃이 이웃을 교회로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경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부모를 데려오고난 다음에는 얼마나 노심초사할까요?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남편이 아내를 교회로 데려오고서 얼마나 간절할까요?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친구가 이웃이 같은 친구와 이웃을 데려오고서 꼭 바라는 것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을 쌓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미국에 있을 때에 온 가족이 그랜드캐년을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우리 지인이도 있었는데 저는 지인이가 그 장관을 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더니 구경을 다 하고 나올 때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안타깝지요. 그 멋진 구경을 못하게 말았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때 잠들어버려서 못보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몸은 둘 수 있지만 마음은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스려야 합니다. 정성스럽게 단을 쌓을 수 있도록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해서 정성스럽게 마음의 단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 되어주십니다. 야곱은 그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정성스럽게 단을 쌓고 약속을 지키며 은혜를 사모하였을 때 이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가나안 민족들은 야곱의 가족을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야곱가족의 문제는 모두 다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그곳에서 그는 더 큰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처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바로 그 벧엘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를 받으며 그곳의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다시 이름붙였습니다. 그 뜻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니까 엘벨엘이면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은혜가 더욱 커지고 커진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의 명령을 어디서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을까요? 그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는 충만하며,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명령을 가장 잘 수행하도록 돕는 곳입니다. 올 한해 교회가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곳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더욱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오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에 올 한해가 가장 성공적이며 가정 보람되고 가장 뜻깊은 한해가 될 줄 믿습니다.
*개요 {1역사서} <1적용> <2시점> [0복음]~[8사역] [5-1계획] 1. 야곱은 세겜에 머무르면서 커다란 문제를 만나게 되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자기 자신을 깨달았습니다. 2.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위해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졌으며, 우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복하였고, 단을 쌓기 위해서 다스렸습니다. 3. 하나님은 이렇게 벧엘로 찾아와 약속을 지킨 야곱에게 약속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4. 우리는 주님의 일을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갚고 그 은혜를 더욱 누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