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 세상에는
구원받은 우리는 매우 특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은 세상 나라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은밀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비교할 때에 너무나 놀랍고 귀한 곳입니다. 사실
그 나라는 이 세상속에서는 그 진정한 가치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숨겨진 비밀과도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 속에 품고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이러한 비밀스러운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44절입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후에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놀라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숨겨두었고 돌아가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 버렸습니다. 그 밭에 지불한 값은 그 밭에 있었던 보화를 생각하면 절대로 아까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화가 주는 값어치는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지불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밭에 있던 보화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 천국은 내가 마음속에 두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뻐함으로 인해서 내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살 수 있는 그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사람이 알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내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살 수 있는 그런 값어치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그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밭이라고 한다면 이 밭과 같은 삶속에서 알게 된 놀라운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썩어져 가는 세대와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놀라운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없었다면 우리는 평생 밭만 갈다가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루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되었습니다. 그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 속에 그 놀라운 영생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모은 일로 인해서 심판을 받지 않고 예수님께서 대신 그 심판을 받아주셔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우칠 때 우리는 진정한 마음 속의 보화, 인생의 보화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게 된 하나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밭을 갈고 있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밭의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밭을 가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밭을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세상 사람들과 달라지게
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그 기쁨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때에 그 모습은 단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기뻐하면서 그 보이는 것들에만 치중하면서 살아가는 자들과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경건’은 영어로 ‘godliness’입니다. ‘경건한’은 ‘godly’입니다. 반대로 ‘세속적’은 무엇일까요? ‘worldly’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임’은 ‘worldliness’가 됩니다. 단어 그 의미에서도 보여지듯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의 삶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경건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고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는 ‘세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경건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구별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건의 핵심 속에는 바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이 모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차별되며 색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이 기쁨 속에는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숨겨두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예를들면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 그 당첨금을 숨겨두고 살아간다의 그 ‘숨겨두고’라는 말일까요? 또는
땅값이 오르리라는 것을 구체적인 개발정보를 숨겨두고 토지를 매입할 때의 ‘숨겨두고’라는 말일까요? 분명 천국의 기쁨은 좋은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살수 있을 것같은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이지만, 왜 그 ‘숨겨두고’를 로또나 땅값상승이나 기타 다른 은밀한 부가가치에 빗대어
생각할 때에는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천국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켰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밭에 감추인 보화라고 할 때 그 의미를
자기 혼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가치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가치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지 요행을 바라고 시세차익만을 추구하며 자기 자신만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그 ‘숨겨두고’라는 표현을 안좋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숨겨두고’는 ‘있던
제자리에 다시 묻어두고’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았을 때 그것을 자신의 품속에 숨겨놓고 밖으로 빼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 밭에 소속되어 있던 것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밭에서 감추어져 있던 보화를 발견한다면 그냥 보화만 끄집어 내고 도망갈 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쁨은 밭에서 보화를 빼어 내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부정직하게 보화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당한 돈을 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사고 그래서 그 속에 있는 보화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보화는 바로 밭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말을 앞에서 생각해본 ‘경건’에 적용을 해봅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 성경이 보여주는 경건은 무엇일까요? 그 경건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깨닫는 것이었을 때, 그 보화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이 삶으로부터 단절된 경건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속세를 떠나서 은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모든 인간관계를 버리고 나만의 외로운 성을 쌓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밭에 다시 보화를 놔두어야 합니다. 밭에 보화가 있고 그 보화만 꺼내어 갈 수 없습니다. 밭을 사야만
하고 그럴 때 보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 속에서 경건이 의미가 있지 이 세상을
떠나서 경건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속에서 불법한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불경건한 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이루어내는 경건이 참된 경건이지 그들을 떠나서 홀로 있으면서 이루어내는 경건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건이란 불경건 사이에서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적인 것은 세속적인 것 사이에서 오히려 그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꺼내어 가져가려고 하지 말고 그 보화가 담겨있는 밭을
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밭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사는 일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이루고
성취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길을 걸어 다니다가 나무에 이마를 부딪혀 피를 흘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마에 피가 흐르는 사람을 보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말을 듣고 싶어하던 바리새인들은 아예 집에서 나올 때부터 자신의 이마를 벽에 찧어 피를 흘리며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경건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진정한
경건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참된 경건이란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 속에
살지만 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내 것을 다 파는 일입니다. 이점이 오늘
본문 두 번째 반복되는 구절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첫 번째는
밭을 샀고 두 번째에는 진주를 샀습니다. 구입한 내용물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비유속에 동일한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소유를 다 판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에서는 다시 밭에 묻어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시
묻어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귀한 가치는 그냥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놓고 파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값진
진주처럼 말입니다. 그 장사가 비싼 진주를 보고 그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에 그는 그것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사기 우해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사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렇게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건하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게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침잠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합니다. 점심을 먹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식사전 기도를 합니다. 순간의 창피함과 시간의 지체를 포기합니다. 저녁에
술자리나 혹은 세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때 모임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참석하더라도 술이나 담배를 멀리하면서 뭇 사람들의 비난과 질책을 감수합니다. 편안하게 어울리는 것을 포기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일에 있는 각종 모임들을 포기합니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즐거움과 유쾌함과 인간관계와 각종
유익들을 포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기 때문에 포기했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모든 것을 들여서 산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며
담대해지며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는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가에
따라서 매겨집니다. 예술품의 가치가 그것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듯이 신앙과 믿음의
가치도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따라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많은 것을 포기했을
때 그 신앙은 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얻게 되는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열정은 얼른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그것을 얻고자 하고 노력해서
그것을 얻습니다. 마침내 그것을 얻을 때 우리는 가장 기뻐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진가를 알아보고 나서 나의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내 자신의 것을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것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얻게 된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게 됩니다. 진정한 희락과
기쁨이 나에게 넘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현재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이루어나가야 하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경건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함으로 누리는 기쁨과 희락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이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경건하여 하나님을 찾고 찾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므온이었습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경건하여
이 세상에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럴 때 그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시는 메시야를 보게 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가
그 예언대로 메시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평안히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었고 놓아주심을 경험하면서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그 영광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은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자들의 삶속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받은 자만 알 것입니다. 누리는 자만 알 것입니다. 그 밭에 감추인 보화는 그 값비싼 진주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세속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붙드시고 그리고 구원으로 놓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고 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