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연적인 현상과 우연과 필연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운이 좋은 것 뿐이고 언제든지 악이 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신은 별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은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은혜를 베풀지도 않고 악을 처벌하지도 않고 악인은 그냥 내버려 둔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엄청난 재난을 만나거나 분통터지는 일을 겪게 될 때에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전에 신이 있다고 생각이라도 한 사람들입니다. 진짜 신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런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예전에 철학수업을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신이 있느냐 없느냐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데 동양철학에서는 아예 신에 대한 말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우주의 원리나 보이지 않는 흐름 정도를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프리카에 사는 어떤 사람들은 사는동안 한번도 눈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눈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세계에서만 그럴 것입니다. 그 세계를 조금 벗어나면 눈이 내리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에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무리 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한다 하더라도 신을 없애버리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게 만들수는 없습니다. 오직 자기 세계에서만 신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세계에서 조금 벗어나서 정말로 신이 있는 세계로 들어와 본다면 그 신의 이름은 하나님이고 그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있는 세계로 나아가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이라는 세계속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에서 보는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만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으로 유대 기브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것은 한 인간의 꿈 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실 이러한 일은 어느 누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꿈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유대 기브온으로 가야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과 솔로몬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습니다. 이 대화 속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그는 하나님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하는 이유는 주의 백성을 잘 재판할 수 있기 위함이라고 했고 더 나아가서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간구였습니다.
솔로문은 분명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계시느냐에 관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천국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옥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것은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성’일 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종교성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그분이 나를 도우십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와 상관이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나의 간구와 소원과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솔로몬에게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은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왕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참 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유익이나 편안이나 쾌락을 추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그런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있는 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런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간구’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간구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와 별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여전히 종교는 문화일 수 밖에 없고 형식으로 치우칠 뿐입니다. 하지만 ‘간구’를 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나와 연결되십니다. 내가 손을 내어밀때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간구나 막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미는 첫 손은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악하고 더럽고 추잡한 간구를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잡아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씻을 때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좋은 간구는 솔로몬의 기도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마음’을 간구했습니다. 그 목적도 자신의 책임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습니다. 우리도 어떠한 ‘마음’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죄악된 마음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런 기도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매를 용서할 수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희생하고 용납하며 인내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좋은 기도제목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이기적인 것을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간구하는 손이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나의 악함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놀라움은 계속됩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것은 충격에 더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주님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나라의 평안과 강성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그런 것들 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들도 주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하면 안됩니다. 부귀와 영광과 능력과 존귀는 구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장수하기를 구해서는 안되며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것도 구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하나님과 상관되어지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싫어하시며 어떠한 것을 기뻐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잘 알지 못하고 구하기만 한다면 그런 기도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과 멀어지고 그런 추한 마음을 가지면 가질 수록 결국에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온전한 개념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우연과 필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존재하고 부처님도 존재하고 성모마리아도 있고 알라신과 부두교 등등 모든 신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신과 자신은 별다른 관계가 없습니다. 신은 신이고 나는 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보다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신 중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자들입니다. 그 유익은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과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새로운 마음입니다.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황 속에서 낙심하지 않으며 더욱 발전하고 새로워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더욱 착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희생하고 봉사하고 용서하고 화목케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의 선함과 착함을 본받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