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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43눅23:32-38 죄인들을 위해 못박히신 온 세상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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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눅23:32-38 죄인들을 위해 못박히신 온 세상의 왕_1



  2011.4.13. 주일오전, 예수 그리스도 [5-4용서]

예수님이 못박혀 죽으신 고난주간과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이른 것이 아닙니다. 사실 1년 열두 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묵상해도 전혀 과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의 의미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다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년 열두 달을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은혜도 묵상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4월 만큼은 주님에 대한 묵상이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바로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그냥 우리를 위해서 손쉽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그냥 죽으시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그 모든 죄값을 치르고 계십니다. 그 사소한 고통과 그 구체적인 괴로움을 하나 하나 다 받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간단하게 죽으실 수가 없었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냥 빨리 죽고 끝났으면 그래서 일괄적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졌으면 우리도 마음이 편하고 주님도 구원하시기가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죄값을 치르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당하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그 모든 아픔을 다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래서 주님은 채찍에 맞아 온몸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는 끔찍한 일을 당하셔야 했으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셔서 머리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가시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고,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셔야 했으며, 십자가에 뉘여 대못을 양손과 양발에 박히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대로 올려져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 나가 끝없는 고통에 고통이 이어진 다음에 마침내 심장이 멈출 때까지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끔찍하고 복잡하며 잔인하고 가혹한 죄값을 치루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예수님 자신의 죄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때문에 나의 죄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받으셨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죄가 사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가 사하여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Mos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Most는 체코어로 ‘다리’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배가 지나가면 다리를 들어올리고 기차가 지나가면 다리를 내리는 개폐식 교각에서 일하는 한 아버지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다니기를 좋아해서 자주 자신이 일하는 그 교각에 데리고 갔습니다. 어느 날 배가 지나가서 다리를 올려놓고 아들은 강에서 놀고 있다가 멀리서 기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린 아들은 놀라서 교각으로 달려 올라가 다리 밑에 들어가서 다리를 작동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합니다. 하지만 기차가 너무 빨리 다가와서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밑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기차에 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내려버립니다. 아들은 내려진 다리에 깔려서 죽고 말았고 그 희생으로 인해 기차는 무사히 다리를 통과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들을 살리려고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했던 것이지요.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겪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는 사함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 자신이 그 죄를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죄는 우리 부모의 죄이며 바로 우리 자신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은 반드시 그로 인한 형벌을 통해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32절을 자세히 보면 정말 그렇게 자신의 죄값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이들은 악을 행하고 그로 인해 심판을 받아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두손과 두발에 못을 박혔습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리는 그 끔찍한 고통 이후에 그들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그런 악한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심판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심판하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다 갚은 것일까요? 사형을 언도받고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의인이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로 인해서 죄악을 사함받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그런 사망에 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십자가에 달렸다 하더라도 다 갚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겐 알려진 것보다도 더 많은 숨겨진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서도 그 죄를 다 갚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살아있을 때 갚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죄를 갚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을 갔다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지옥을 갔다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옥은 단순히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그런 세계만은 아닙니다. 천국이 우리의 상상보다 더욱 뛰어난 것 처럼, 지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끔찍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자기의 지은 죄대로 계속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을 보고 싶다면 그 심판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 위에 바로 죄인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으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처럼 고통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구원하려고 적은 전도대상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기를 우리는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전도대상자로 적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적은 그들을 위해서 새벽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하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스스로 죄값을 감당하려고 할까요?
그들의 믿지않음이 너무나 안타깝지만 결국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 그리고 저세상에서 받게될 형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입니다. 채찍으로 내려칠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은 견딜 만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냥 그 자체로도 기절해버리는 고통입니다. 머리에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푹 씌운다고 해보십시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가시들은 아무 생각도 못하고 그저 소리만 지르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발에 힘이 빠지고 손에는 아무 기력도 없지만 그래도 질질 끌려가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이윽고 십자가에 뉘여집니다. 그리고 양손에 대못이 박힙니다. 그 커다란 못이 살갗을 뚫고 근육을 으깨버리고 뼈를 부순다음 손을 뚫어서 나무에 박힙니다. 고통스러워서 죄인은 얼마나 울부짖겠습니까? 그에 모자라서 양발에 다시 대못을 박습니다. 동일하게 살갗이 뚫리고 근육이 뚫리고 뼈가 부러지면서 나무에 못이 박히면서 고정되니 그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총 4번을 해야 합니다. 오른 손과 왼 손, 오른 발과 왼 발, 사지를 다 나무에 박을 때까지 그 심판의 고통은 지속됩니다.

그리고 나무에 달립니다. 뜨거운 태양에 축늘어져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죄인은 이제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다. 목마름과 기진맥진함과 탈진함이 지속되어 이제 죽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이세상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으로서 끝이 났겠지만 지옥에서의 고통은 결코 사라지거나 약화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정말 한계에 이를 때쯤 다시 처음부터 이 고통이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신 고통이고 그것을 믿지 않을 때 이제 그 고통이 바로 각 사람의 고통이 됩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게되는 자들이 우리가 써낸 전도대상자들입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그 고통을 받는 죄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든 고통을 바로 주님이 대신 담당해주셨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신 놀라우신 사랑의 희생에 올라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대신에 모든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으로 나아오라고 그들을 부릅니다. 그냥 믿지 않는대로 살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십자가를 지지 말고, 스스로 죄의 형벌을 받지 말고, 돌이켜서 예수님의 대신 갚아주시는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고통을 받으셨고 그 혜택을 받는 자리가 넉넉하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리로 들어오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믿을 때 우리도 죄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자들은 아무도 죄값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상급의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상급이 적고 크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자유로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에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부르짖으심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구원의 원리를 깨닫고 그 자유로움을 누리며 죄값에서 해방되어서 최소한 자신만은 마음 편하게 살게 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통 속에서 부르짖으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주님은 그냥 잠자코 아무 말도 없이 죽어가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인간들을 위해서 안타깝게 하나님께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그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더욱 예수님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의 옷까지 나누어 제비뽑았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왜 주님이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바로 미래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지옥에 떨어질 사탄의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게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타까워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심하기 전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훼방하는 악하디 악한 자였습니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그가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은 그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회개할 그가 주님을 못박고 주님의 옷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가 스데반을 죽일 때 가편투표를 하고 옷을 맡아주는 일을 하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괴롭게 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를 위해서 예수님은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그 부르짖음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죄를 사함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놀라운 간증자인 이어령씨와 김하중 장로님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무신론자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옷을 나누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중에 구원받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될 그들을 위해서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런 주님의 탄식은 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뭐라고 기도하실까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모든 고난을 당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뭐라고 부르짖으실까요?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을 못박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잊어버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인합니다. 간음합니다. 도적질합니다. 거짓증거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을 못박고 주님의 옷을 나누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욕하며 그 교회를 나누어 가져갑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다시한번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주님은 안타까워서 부르짖습니다. ‘아버지여 저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구원얻을 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을 얻었으나 상급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구원얻었음만 즐기면서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는 구원얻은 성도들 때문에 기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여전히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여전히 살인하며 여전히 간음하며 여전히 도적질하며 여전히 거짓증거하며 여전히 이웃의 것을 탐내며 살아가겠지요. 교회 안에서 서로 미워하며 서로 배척하며 서로 빼앗으며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또한 그런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서 내가 저래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비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트린 이 어리석은 성도들이 언젠가는 깨닫고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 지를 알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부르짖으십니다. 여러분,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언젠가는 지금 하는 있는 삶대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점차 그렇게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 대에 안된다면 우리 자식들대에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자들의 양심입니다. 그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자들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려고 하고 최소한의 죄책감과 양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애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의 주를 비방하는 모습을 버리고 주를 괴롭게 하는 죄악을 금하고 이 사순절 기간동안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주를 비방하며 희롱하며 신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하던 그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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