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12-14, 주일오후 ) 우리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슬픔과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로 그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혹은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혹은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때로는 힘든 일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반드시 해내야 하고 그럴 때 참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겪어야 하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또한 예수님이 나아오시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르다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찾으신 예수님은 그 앞에 서셔서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전에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들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말할 때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주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분명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 않으신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수근거렸습니다. 그것이 통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해서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이제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는 분명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순간에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던 주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모든 비난과 멸시를 송두리채 없애버릴 특별한 일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순간 모든 시선은 예수님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죽어가는 나사로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하신 그분께서 이미 죽어버리고 장사되어버린 나사로에게 대해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을까요? 이것은 나사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마르다가 뛰쳐 나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마르다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명하셨고 사람들은 그냥 얼떨결에 혹은 심중에 통분히 여기신 예수님의 기세에 눌려서 정말 돌을 옮겨 놓을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가 앞서서 그 계획을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도대체 그녀는 왜 예수님을 막아섰을까요? 그녀는 누구를 위해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위해서일까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일까요? 그녀는 예수님이 괜히 창피를 당할까봐 막아선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헛수고할까봐 미리 예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죽은 사람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 싫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믿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행하실 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은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믿음을 가져라!’ 예수님은 이것을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타이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르다에게 말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시 원래의 의문점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좌절 속에서 모든 실패 속에서 모든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모든 암담한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동일합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또 다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뭔가 더 놀라운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가능성을 스스로 미리 판단하지 말고 순종함으로 따를 때 더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에 가나안 백성들은 신장이 거대했고 그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고 7일 후 그들이 가져온 정보에 의해서 백성들은 낙담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외쳤지만 백성들의 절망 속에 그들의 외침은 파묻혀버리고 돌을 들어 모세와 함께 그들을 치려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광야로 보내셨고 정탐했던 1일을 10년으로 계산하여 70년 후에 다시 도전하게 하셨습니다. 70년을 그렇게 보낸 뒤 원래 처음 도전했던 자들은 다 죽고 그들의 자녀들이 또 다시 도전했습니다. 여전히 가나안에 사는 아낙 자손들은 강했습니다. 아니 더 많은 철병거와 더 큰 신장을 자랑했습니다. 도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출애굽의 경험이 없었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아낙 자손들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이 두 민족에 대한 비교적인 통계나 경험이나 환경적인 요소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수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낙 자손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이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현재 이 시간에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마르다는 과연 무엇을 믿었는지 살펴보십시오. 마르다는 무엇을 믿었습니까?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도록 했습니다. 어쩌면 마르다의 허락이 없이는 사람들은 그 무덤의 돌을 옮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일한 혈육이요 유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허락했기에 돌은 옮겨질 수 있었습니다. 돌이 옮겨지지 않는다면 결코 나사로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의 다시 살아남은 예수님이 나중에 보여주신 부활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돌을 뚫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나사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돌을 옮겨놓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다가 행한 일은 분명합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돌을 옮겼습니다. 그녀 자신이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녀의 뜻에 의해서 그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돌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그 무거운 돌을 옮겨야 합니다. 또한 옮기라고 하실때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돌같이 무거운 팔을, 그 돌같이 무거운 발을, 그 돌같이 무거운 머리를, 그 돌같이 무거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미움에 분노에 절망에 두려움에 죄책감에 수치심에 의해 돌처럼 굳어져 버리고 무덤의 문을 막아서서 완전히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린 그 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그렇게 했을 때에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모든 것을 다 행하셨습니다.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도 편안하게 그리고 너무도 간단하게….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한 마디에 나사로는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너무나 쉽게 이루십니다. 천지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늘 하시는 일이고 하시면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진짜 힘든 일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돌을 움직이는 것이 그 다음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이룬다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말이!’
주님을 믿음으로써 죽은 자를 다시 받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라고 나올 때 그 여자들은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아니 더 많은 여자들, 예수님의 부활을 받은 자들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여자들은 모두 믿음으로써 그런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내어 드려야 할 것을 드립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또한 결국에 우리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일을 사모하며 더욱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누리는 놀라운 유익을 만끽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