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만약 여러분이 어떻게 전도를 하는지를 배우지 않았을 때 스스로 자유롭게 전도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전도하십니까? 사영리가 아니라 전도폭발이 아니라 아무런 전도구호를 갖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전도를 한다면 무엇을 이야기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교회를 이야기 한다거나 삶을 이야기한다거나 공교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말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래야 전도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바울은 그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박히신 것 만을 말하기로 결심합니다. 1,2절을 함께 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이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그가 말과 지혜로 하려고 했으면 얼마나 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또한 우리 자신과 관계된 그 무엇인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자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앞서 1장 31절에서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3절과 24절에 나와있는 말씀의 재인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9장 23,24절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렘9: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랑은 자기 자신과 그와 관계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과 관계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정말로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만을 전하며 그것을 전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자신을 낮추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서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겸손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그렇게 자신의 능력과 지혜의 부족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니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신앙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허세와 거만과 자기의로 가득한 자들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부정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안믿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는 사람을 만날 때에 신앙수준에 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도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해도 전도를 할 때에는 신앙수준에 관한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의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던지는 네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성령충만을 받으십니까, 사명감당하십니까’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우리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있음이 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연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앞선 1장 29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임을 알려줍니다.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정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부족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부족한 자들입니다. 저는 부족한 목사요 여러분은 부족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정말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가 우리를 늘 살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너무 연약하지만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해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겸손과 감사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전도를 할 때에 교회에 다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성령충만을 받으십니까, 사명감당하십니까’를 물어볼 때에 도리어 당신은 어떠냐고 질문을 받을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지,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성령충만 한지, 사명감당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어떤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요?
뿐만 아니라 만약 동일한 상황이라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는 말과 지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작정하였는데 그 자신은 정말 얼마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부끄럽지 않고 살았을까요? 오늘 본문말씀 2장 3절에 보면 여기에 대한 그의 고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그는 당당하고 강하며 자신만만해야 할 텐데 그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구보다도 더욱 자신이 자신만만함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왜 그렇게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을까요? 그 다음에 그의 이러한 연약함의 이유가 나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는 성령이 나타나고 그 능력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가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은 것은 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은 설명하자면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의 믿음이 온전히 서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었는지 아느냐, 그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러졌느니라’
사도 바울은 만약 당신은 얼마나 믿음이 있냐고, 얼마나 구원의 확신이 있냐고, 얼마나 성령충만하냐고, 얼마나 사명감당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더 큰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큰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하기 위해 날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명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모습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으로 전도함이 이루어지기를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를 항상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완성되었다면 전도하겠습니까? 우리가 완벽하다면 전도하겠습니까? 우리가 다 이루었다면 전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 완전해지고 전도를 통해 완벽해지며 전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은 전도를 통해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배와 후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지 먼저 배우고 먼저 되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좀더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고참과 신참이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얼마나 더 빨리 군대에 들어왔는가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좀더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선임자와 후임자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나이나 입사의 차이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선배와 후배의 차이는, 고참과 신참의 차이는, 선임자와 후임자의 차이는 얼마나 그 일에 숙련되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먼저된 자라면 나중된 자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신앙에 있어서 먼저된 자가 아닙니다. 먼저된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끊임없이 뒤쳐지는 자이며 항상 나중이 되는 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까요? 오래 전에 믿은 자였지만 아직도 믿음의 초보를 반복하기를 원하실까요? 그래서 계속 아이처럼 했던 것을 반복하고 반복하기를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큰 일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히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생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된 자가 되어서 나중 된 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합니다.
저는 둘째 지인이를 갖게 되고서 늘 첫째 예인이에게 하는 당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니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예인이는 언니이지만 예인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언니같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냥 혼자서 외동딸로 자란 그 어린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봅니다. 더이상 외동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인이는 계속 혼자서 자란 티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말해주는 것은 그것입니다. 동생을 돌보라고 동생을 가르치라고 말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의 방법으로 복음의 내용으로 우리는 항상 나중된 자에게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도를 감당하겠다는 사명감당의 열심으로, 전도를 할때 느끼는 그 부담감을 성령충만으로, 전하는 복음을 통해 정말로 구원받음을 믿는 구원의 확신으로, 하나님이 전도할 때 함께 하심을 믿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전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먼저 된 자로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계속되는 전도의 노력을 통해 올 한해가 가기 전에 더욱 큰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2시점> [8사역-전도]~[0복음-죽음]
1. 믿는 자들에게 주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
2. 교회를 다니는 자들에게 우리는 네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타나시기를 원하신다.
4.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를 간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