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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성숙] 42눅10; 10-16 먼지를 털어버리는 이유

 

42눅10; 10-16 먼지를 털어버리는 이유_2

 

 2013.1.27.주.주일오후.   전도설교

 

*개요   {5복음서} <1적용> [8사역]-[5은혜]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줄을 알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시니라

 

 

1.    예수님의 전도자는 심판을 기억면서 나님의 나라를 증거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에 우리 생각에는 전도란 정말 좋은 일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전도란 너무 안좋은 일입니다. 왜냐면 억지로 이 모든 것을 기 때문입니다. 전도가 그것을 원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유익한 일이지만, 싫어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기호와 성향만의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싫어더라도 해야만 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때문입니다. 심판받는다는 사실이 우리로 여금 받는 사람이 싫어더라도 전도를 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의 전도자들은 바로 그점을 깨닫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억면서 이렇게 말씀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줄을 알라 라”

 

예수님은 영접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고, 더불어 영접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접지 않는다면 거리로 나와서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노라고 말라고 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식대로 말자면 손에 묻은 먼지를 터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이나 혹은 미안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거부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증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는 것이 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님의 나라는 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러한 나님의 통치는 그 통치가 임지 않는 곳에 대한 심판을 내포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정부가 입법기능만 있고 치안기능이라든지 국방기능이 없다면 무의미한 정부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부의 모든 기능이 다 있을 때에 비로소 정부의 의미가 있습니다.

 

 

2.    소돔은 경고없이 멸망였지만 경고를 받고도 멸망한 도시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서 예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제시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으로 인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나님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권능이 있으신 분입니다. 12절입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그 날은 심판의 날이었고 그날에 심판받는 장소로 바로 그 먼지를 떨어버리는 곳이 선정됩니다. 그리고 그곳은 소돔성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유황불로 멸망당한 소돔성이 오히려 더 견딜 수 있는 곳이 됩니다. 그들은 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지 않고 멸망당한 도시였습니다. 물며 경고를 받으면서도 거부한다면 그들은 얼마나 큰 죄를 짓는 자들입니까?

 

 

3.    우리는 권능을 나타내시면서 돌아오게 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전도에 있어서 우리는 단지 경고가 없던 시대에 산다고 해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경고가 있는 시대에 살게 되면 그것을 거부면 더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벌을 받는 것에서는 동일니까 상관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벌의 경중을 생각할 때 가중처벌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더 큰 괴로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권능을 알게 될 때 그 권능을 무시거나 외면지 말고 그속의 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적십자 회비는 자원는 사람만 해당되지만 범칙금 통지서는 반드시 납부를 해야 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법의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원리를 13,14절에서 보게 됩니다.

13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권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권능이 증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권능의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소식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스스로의 행동과 삶을 변화시킬 때에 우리는 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외면한다면 나님의 나라 밖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4.    가버나움은 권능을 보고도 나님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권능을 보고도 따르지 않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은 대표적인 이유로 거만함을 들고 있습니다. 그 거만함이 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무시고 폄였던 것입니다.

15    가버나움아 네가 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그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쪽 해안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매우 번화해서 세관도 있었고 큰 회당도 있었으며 주민들이 많았던 마을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살던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주로 활동 셨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함으로써 그의 신성과 전지전능함을 나타 내셨습니다. 구체적인 예로는 예수님은 회당에서 설교셨고 문둥병자를 고치셨으며 중풍병으로 누운 종을 낳게 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으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낫게 셨으며 맹인들의 눈을 뜨게 셨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고 가버나움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보다 가버나움 사람들의 자긍심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배은망덕한 도시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여서 이미 그 도시는 파괴되고 잊혀졌습니다. 오늘날 가버나움은 폐허 더미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나님의 심판을 외면고 부인할 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두려워고 순종할 때에 돌아오는 것은 나님의 축복입니다. 전도는 바로 이러한 심판과 축복을 동시에 증거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통해 이러한 선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분명한 확신 속에서 심판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그럴 때 나님은 우리를 통해 전도는 열매들 속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가 나타내는 나님을 통해 우리도 그 영광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전도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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