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꿈과도 같았고 이상과도 같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꿈 속에서 일어난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상태 속에서 보게된 환상은 그의 지금까지의 생각과 개념을 깨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이방인에 대해서는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유대인들만 바라보았고 유대인들도 이미 헬라파 유대인들과 원 유대인들이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산적한 상황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복음화시키는 것이 또한 베드로에게 있는 간절한 소원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전파의 길을 여셨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져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셨고 이방인들을 자기 자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준비시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말씀을 세 번이나 들려주시면서 하나님은 정말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자신이 속되다 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자신이 속되다고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신은 싫다고 해서는 안되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자신을 싫다고 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전에 일어난 환상의 의미였고 그것은 그가 기도시간에 경험한 치열한 갈등과 고민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고민과 갈등의 시간을 기도시간에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단지 간구하기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기도속에서 하나님은 그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심각한 고민과 갈등 속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하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나는 두렵지만 이겨내면서 견디게 하시는 환경이 있습니다. 나는 도망가고 싶지만 인내로 버티게 하시는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나는 너무나 하고 싶지만 그것을 참게 하시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이런 고민이 기도시간에 일어나면 그것은 마치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는 것과 같고 그 씨름이 끝날 때쯤 결국에는 두손 두발 들고 하나님께 항복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패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고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며 문제가 아니라 형통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기도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으면서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변화되었고 새로운 복음전파의 방향에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일을 거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기도는 끝이 났습니다. 과연 그 기도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기도 다음에 어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가 지붕 위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에 아래에서는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집 앞에서 베드로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기도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베드로의 태도였습니다. 그는 방금전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성령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그 의미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어떤 유력한 위치에 있는 이방인이 그 사람들을 보내었던 것이고 그들은 베드로가 자신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바로 고넬료였고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사모하고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로 베드로를 초청하였고 그 종들이 바로 베드로의 집에 왔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주셨고 그 환상이 끝나자 사람들을 보내어 모든 일이 착착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처럼 주도면밀하십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고 조금의 미스도 없이 그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일을 그렇게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에게 이상을 보이시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알리시며 성령을 통해 설명하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이 저절로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실제로 스스로 지어 성취하십니다.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그는 얼마나 이 일에 협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 협력은 얼마나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답을 듣고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고 그 다음 날 저희와 함께 갔습니다. 갈 때에도 형제 두어 명과 함께 갔습니다. 그의 태도와 행동 속에서 신중함이 느껴집니다. 아니 어떤 두려움도 느껴집니다. 여전히 믿지 아니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저하는 모습도 언뜻 옅보입니다. 왜 좀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는지는 역시 이 후에 드러납니다.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 이방인에 대한 수치심, 이방인에 대한 닫힌 마음 이런 것들이 끝까지 적극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이러한 모습을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베드로를 움직이게 하셨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를 통해 이방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작이 되어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봇물터지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방인 구원의 주역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의 소극적인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으면서도 자꾸만 묻고 자꾸만 의심하고 자꾸만 주저하던 그의 태도가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투입하게 했고 그가 바로 이방인 구원에 목숨을 바쳤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주님은 이끄십니다. 그 이끄심은 너무나 분명하십니다. 하지만 끌려가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기뻐서 즐거움으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오래 하지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하지 않는다면 감사함으로 하지 않는다면 얼마 못가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일을 더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교회의 사역이 힘을 합쳐 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갈고 닦은 것이 유감없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