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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교육] 구원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40마27 구원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진다_2

 마27:3-10 / 2011.3.6. 주일오후 , 전도학교, [5-3희생]

인터넷에는 자신의 고민을 올리고 그 고민에 대해서 해답을 여러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답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답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질문들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최근 자살은 더 이상 소수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1년에 사망하는 사람은 24만 3934명(2006년 통계청 기준)이고, 이 중 14%인 1만 688명이 자살 사망자입니다. 전체 사망 원인 중 7위로, 10년 전인 1996년보다 2계단 상승했습니다. 현재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 증가율 1위입니다. 2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매일 평균 96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이 중 30명이 사망합니다. 평균 48분에 1명꼴입니다. 연세대 南潤榮(남윤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00년부터 5년간 한국에서 이용된 자살 방법은 絞殺(교살), 농약 복용, 추락, 기타 약물 복용 순이다. 자살자 중 상당수(60%)가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자살은 봄(5월ㆍ9.9%)에 가장 많이 발생하고, 여름ㆍ가을ㆍ겨울(12월ㆍ5.9%) 순으로 이어집니다. 자살사망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충남이 1위, 강원이 2위이고 서울이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자살사망률은 언론보도와 人名(인명)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권고 기준에 따르면, 유명인이 자살해 대대적인 보도가 이뤄질 경우 후속 자살률이 14.3배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매체의 경우 짧고 간단한 TV 보도보다 심층적인 신문 보도가 더 영향력이 큽니다. 특히 자살 기사가 1면에 실리거나 ‘자살’이란 용어가 헤드라인으로 쓰일 때, 자살한 사람의 사진이 실릴 때 자살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고 합니다. 자살 방법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거나, 자살 동기가 낭만적으로 보도될수록 모방 자살이 증가합니다.

이런 자살국가에서 당연히 자살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살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고민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살을 하면 정말 지옥에 가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살을 하고 나면 자신이 죽어버려서 더 이상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자살을 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가는 것은 이미 결정이 되있기 때문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자살을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자살을 하는 것은 지옥을 가던 천국에 가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살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자살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여기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결국에는 지옥에 가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지옥게 가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자살 여부에 상관없이 다 죽은 다음에는 천국에 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죽어서 지옥이라는 곳에 가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것은 죽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죽은 다음에 가능한 천국에 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원하는 것은 지옥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에 안 갈 수 있는 방법보다 천국에 가는 방법을 알면 더 좋지 않을까요? 자살을 해도 지옥에 안가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한 방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을 피하려고 하다보면 지옥을 생각함으로 괴로워지지만 천국을 들어가려고 하다보면 천국을 생각함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로 자살이라는 끔찍한 모습을 통해 지옥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을 사모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3,4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기는 대신에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뉘우침은 회개를 했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죄에 대한 고백과 그 죄를 벗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그는 죄의 고백도 하지 않았고 그 죄를 벗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3,4절은 무엇인가요? 가룟 유다는 후회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찾아간 사람들은 바로 그 죄악을 조장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그 죄악에 대해서 오히려 더큰 죄를 짓도록 종용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살인을 저지르도록 충동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후회의 마음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후회하는 그를 비웃으면서 그렇게 후회할 거면 그냥 스스로 죽어버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끼리의 비난과 저주 속에서 가룟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회개와 반성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스스로의 좌절과 절망이었을 뿐입니다.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이처럼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미 그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옥같은 좌절과 지옥같은 절망이 자살하는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지옥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죽으려고 했던 사람을 살려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이 장면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옵니다. 간수는 칼을 빼어 들고 스스로 죽으려고 했지만 바울은 그를 살렸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후회하였을 때 대제사장들은 스스로 감당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는 바울은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이었고 대제사장들은 지옥을 향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대제사장들처럼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지옥을 향하는 자들의 반대로 해야 천국을 사모하는 자의 삶이 어떤 것이며 천국을 향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말 중요한 천국의 관문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간수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고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 그는 천국의 문턱을 들어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시각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문 안쪽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지옥에 가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어서 스스로의 형벌에 빠집니다. 다시 가룟유다의 모습으로 돌아와보십시오.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보십시오. 가룟 유다가 자살을 하여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옥에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천국에 있었으면 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지옥같은 삶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자살을 하지 않았지 속으로는 이미 지옥에 이르러 지옥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부추키며 그러한 생활 속에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죽은 다음에 남은 악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들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그것을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가룟유다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목을 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떨어져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가 쓰다가 버린 못쓰는 땅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피값으로 산 땅이라는 의미의 피밭, 아람어로‘아겔다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반면 천국을 바라보는 자들은 그들의 소유물을 어떻게 하였을까요? 사도행전 16장으로 돌아가서 보면 두 사도는 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루디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루디아는 빌립보에서 처음 믿게 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루디아만 있지 않았습니다.  16장 4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행16: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루디아의 집에는 형제들이 모여서 두 사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디아의 헌신과 사랑은 그 집을 기도처소로 제공하였고 그곳은 형제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으로 어려움에 빠진 사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정반대의 대비입니까? 자살을 하였던 가룟 유다의 피값과 그의 삶은 더 많은 사망자를 묻는 곳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을 향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구원과 기쁨과 감사와 그리고 그런 일들을 하는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지옥에 대해서 그리고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 나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천국에 대해서 천국의 기쁨에 대해서 천국의 사역에 대해서 알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3월에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바로 전도대상자를 정하는 일입니다. 나는 아직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 갖는 일에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바라보면서 들어서는 곳이지 준비를 다 끝내놓고 들어가게 되는 곳이 아닙니다. 이번 한달 전도대상자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옥에 관한 일을 생각하지 말고 천국에 관한 일을 생각하십시오. 사망에 대해서 묵상하지 말고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누구를 살릴 것인가, 누구에게 이 천국의 소망을 전할 것인가, 그것이 여러분을 천국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저 전도대상자를 작정하는 판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록되기를 기대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3감정]-[5은혜]
1. 자살하면 정말 지옥에 가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2.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가게되기를 사모하고 그 과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4.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을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를 사모하면서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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