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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죄책] 40마26;31-35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



40마26;31-35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



2010.6.6.주일오전, [5은혜-희생]

1. 이 세상에는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범죄들이 일어난다.

여러분은 김길태라는 사람과 강호순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한 사람은 연쇄 살인범으로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어 만인의 지탄을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중생 살인범으로 역시 얼굴이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구속된 뒤 처음에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나서 양심의 가택이 있어서 스스로 자백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범죄심리담당 전문경사의 심문을 통해서 범행일체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프로파일러라고 하는데 그 프로파일러의 역할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깨달았고 그 죄책감 속에서 자신이 행한 범죄를 실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파일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프로파일러는 범인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시점에 모든 증거를 놓고 추론하여 범인을 예측해내는 일을 하며 범인이 잡히고 난 다음에도 모든 증거를 통해서 자백을 유도하고 남은 여죄를 밝혀내는 일을 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기법은 ‘죄책감’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없어서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때에 그 행동을 순순히 고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죄책감을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나 해결되지 않은 살인사건의 범죄자가 죄책감이 없다는 것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그렇게 사람목숨을 파리목숨보다도 가볍게 여기고 이 사람 저 사람 죽여대면서도 죄책감이 없으니 그런 사람이 사회에 돌아다니면 계속해서 사람들을 죽이지 않겠습니까? 연쇄살인범의 경우에도 좀더 빨리 범인을 잡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추가적인 범행의 대상이 되지 않았겠지만 빨리 잡지 못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희생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잡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자백을 하지 않아서 죄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이 생겼을 때에 비로소 반복적인 범죄의 행위는 끝이 났고 그때까지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대가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김길태는 재판이 진행중이고 강호순은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디선가 죄책감이 없는 범죄자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짓을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릅니다. 교도소를 갔다오면 죄책감이 생겨야 하는데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죄책감이 없으니 또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희생자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고 우리의 가족이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까? 죄책감이 없다는 것은 언젠가 또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이 세상에는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이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죄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바로 이러한 일들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범죄자들만 죄책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도 죄를 짓지 않는데 성도들이 죄책감이 없으니 죄를 다시 짓습니다. 그렇게 짓는 죄는 중대범죄행위는 아닙니다. 하지만 죄는 죄입니다. 사소하지만 역시 죄는 죄입니다. 죄책감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죄과’라는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죄의 의미는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한 가지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죄입니다. 세상의 흉악범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저지르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해야만 하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 ‘죄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허물’, ‘과오’ 다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죄과’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서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속에서 전형적인 ‘죄책감없는 성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죄과’를 저지르는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주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죄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지을지를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연약함이 있고 죄성이 있고 지을 죄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다 알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이제도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죄성때문에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는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들 힘으로 할 수 있는 죄를 이겨내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자신을 만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죄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과이건 범죄이건 간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결코 우리는 적절하게 죄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죄는 더 큰 죄를 낳고 그로인해서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를 막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지은 죄에 대해서 죄사함을 받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고 새롭고 깨끗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정말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날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 당당함을 보십시오. 그 자신만만함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는 자신이 결코 ‘죄과’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버린다는 것을 주님을 죽이는 것과 비교해보십시오. 주님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죽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죄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주님을 죽이는 것이 더 큰 죄로 보일지 모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버리는 것이 아무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부터 믿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버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떠나가는 것은 주님을 아예 믿지 않았다면 모를까, 믿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있게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말씀해주지 않았어도 그는 주님을 부인했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이 그의 죄를 이미 알고 말씀해주신 것은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되기 위함입니다. 더이상 수제자 베드로라는 허울 속에 스스로를 감추지 말고 솔직히 자신이 부족하고 죄많은 인간임을 고백하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앞으로 일어날 죄는 이미 일어난 죄만큼이나 명확합니다. 베드로는 큰소리는 뻥뻥 쳤지만 한없이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 그대로 그는 그날 밤 정확히 세 번 주님을 부인했고 마지막 세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맞다는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자신이 연약한 죄인임을 깨닫고 슬퍼서 통곡했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할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죄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러한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희생하셨다.

죄에 대해서 당당하던 베드로가 결국 죄를 지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쩌면 측은해보일 지 모릅니다. 남의 얘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나같으면 절대 그러지 않을텐데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겨우 그런 것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었나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 시대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결코 남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명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소명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가정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교회를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들을 우리는 버렸습니다. 하룻 밤새에 우리는 그렇게 소명을 떠나고 가정을 떠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알맹이가 아닙니다. 껍데기뿐입니다. 진짜 그 소명이 아닙니다. 진짜 그 가정이 아닙니다. 진짜 그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속이 없는 허울뿐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사실 떠나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위장이자 포장이며 허위일 뿐입니다. 몸만 있을 뿐이지 사실 마음은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과거에 우리 교회를 떠났던 어떤 성도의 말속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그 이전에 다니던 교회를 떠났던 분입니다. 그러다가 몇년의 공백 끝에 다시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그 교회가 바로 우리교회였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보며 함께 예배드리면서 저는 그분이 교회에 다시 돌아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와서 우리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하던 날,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함께 성경보고 함께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한 가족이지 않았습니까? 왜 떠나시려고 하십니까?”
“목사님, 사실 저는 한번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교회를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가정을 떠나 있습니다. 한번도 가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몸은 가정에 있지만 가정에 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상 위로를 얻는 곳은 가정 이외에 곳에서 위로와 소망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 곳이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소명을 떠나 있었습니다. 한번도 이것이 이세상에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사니까 사는 것이고 하니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속에 충성이 없고 온유가 없고 절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 부르심이 아니니까, 내 소명이 아니니까, 언제든지 그만두고 포기해버릴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동일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과 동일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렇게 부인할 제자들에게 그렇게 결심을 못지키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렇게 주님이 주신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왜 이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우리를 아프게 하기 위해서일까요?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일까요? 지난 기억을 되살려 우리를 슬프게 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얼마나 그런 죄인들을 사랑하셨는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얼마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런 우리들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누가복음에 다시 나옵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시인도 못하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항상 함께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생활 33년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뜻깊고 함께 울고 함께 웃던 3년의 시간이 바로 그들과 함께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높이 세워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때문에 그들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 약점을 이용해서 제자들 전체를 망가뜨리려고 했습니다.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사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과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죄책감을 이용하여 그들을 파괴시켜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제자들 중에 그래도 베드로가 나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탁합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정신없이 무너질 때에 그나마 베드로가 제일 나았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크게 죄책감을 가지게 될 그 베드로가 더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부탁합니다.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죄를 짓기도 전에 그에게 죄책감에 대해서 알려주셨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가 다른 사람을 굳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위해 예수님이 스스로를 버려 죄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4.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다른 사람들을 굳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마음을 떠나 살아왔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범죄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죄지은 것이 없어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건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고 왠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정말 죽여야 그걸 죄로 여기는 사람들이니 다른 것들은 얼마나 쉽게 죄를 저지르겠습니까? 또한 강호순이나 김길태 같은 사람도 그렇게 사람을 죽여놓고도 버젓이 내가 안그랬어요라고 말하는데 증거가 없는 한 살인에 버금가는 죄를 저질렀는지 저지르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인으로서 우리가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가정을 등한시하고 교회를 도외시하며 살아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시며 죽으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이날 이때껏 주의 소명과 가정과 교회를 버리며 살아온 우리들을 위해 주님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 희생을 깨닫는다면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주의 소명과 가정과 교회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버리지 말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버릴 테니까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는 다니던 교회에 상처를 받고 온 분들이 많이 모인다고 합니다. 특히 교회건축과 관련해서 작정헌금을 하다가 포기하고 교회를 떠난 분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건축과 관련해서 그 일을 시작하려는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니까 성도들이 대놓고 목사님에게 말한답니다.
“목사님 저희는 교회건축때문에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마저도 교회를 건축하면 저희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지혜롭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교회를 지으라면 짓고 하나님이 교회를 짓지 말라면 짓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도 주님을 버리더니 또 새롭게 다니던 교회에서도 주님을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 때문에 번번이 맡은 책임을 버리고 이리 저리로 떠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환난이 찾아오면 주님을 떠나는 자들이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어디에선가는 더이상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끝없는 방랑의 시간이 끝나게 되기를 그래서 어디에선가 정착해서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들이 됩시다. 베드로처럼 비록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을 떠났지만 돌이켜 형제들을 굳게 하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게 되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여 도리어 더욱 열심히 주님을 시인하고 붙들고 따르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소명을 지키고, 주님이 주신 가정을 지키고, 주님이 주신 교회를 지키는 자들이 됩시다. 그러한 삶 가운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크신 은혜와 기쁨과 평강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말씀 한번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개요 [적용]
1. 이 세상에는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범죄들이 일어난다.
2. 이 세상에는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이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죄과들이 일어난다.
3. 예수님은 이러한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희생하셨다.
4.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다른 사람들을 굳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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