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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43요10: 11-15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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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요10:
11-15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_1




2012.3.18.주, 주일오전, 주제설교, “대속하심”

*개요   [53희생] {5복음서} <1적용> [4욕구]-[5은혜]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익숙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들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평생을 살면서 항상 접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묵상하고 새겨도 주님의 희생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한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는 그분 자신의 희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로서 주님은 양들을 이끄십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양들이 희생되도록 그냥 놔두시는 것이 아니라 양이 희생되지 않도록 자신의 목숨을 버리십니다. 왜 양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만 할까요? 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까? 왜 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양은 그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잘못으로 인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 자신의 잘못만으로는 목자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자는 자신이 죽지 않고도 얼마든지 양들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리입니다. 이리가 올 때에 목자는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이리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리가 올 때 도망가지 않고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싸워서 양을 지키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계시지만 그와 반대로 삯꾼 목자가 있습니다. 이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올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나 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삯꾼 목자가 달아나 버리면 남은 양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리는 양떼에 뛰어들어 공격하고 양들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천천히 자기 입맛에 맞게 한 마리 한 마리 잡아먹습니다.

그런 목자가 지키는 양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선한 목자가 지키는 양들은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가 그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사탄의 꾀임과 유혹에 빠져 공격을 받고 흩어져서 죄로 빠지지 않도록 지키신 분입니다. 그 악한 죄의 유혹과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두었다면 우리는 결코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유혹을 이겨내고 죄악의 참담함을 깨닫고 돌이켜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어떤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다가왔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얼마를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그것이 아닙니다.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희생의 절정은 그분의 교훈과 병고침과 기적이 아니라, 바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날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감사하게 되며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일까요?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그저 사랑할 뿐인 우리의 마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아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아시고,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몰랐던 점이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그것이 선하거나 혹은 악하거나 그 모든 것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 기사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인데 그 핵심에서 한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네살, 여섯살, 두 아들을 둔 영국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겨우 35년 살았는데, 암에 걸렸습니다. 발견되었을 때에는 말기암이었고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허락된 시간은 고작 2년이었습니다.
그녀는  16세 때 처음 남편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6년 스위스 여행을 함께 갔을 때 청혼을 받고 결혼을 했습니다.그런데 2005년 둘째 임신 중 첫 아이 복부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집중 화학요법과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다리 신경에 손상을 입혔습니다. 평생 걷지 못할지 모른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이 아들의 병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온 엄마 가슴에 암이 생겼습니다. 왼쪽 가슴에 응어리가 만져져서 18개월간 화학요법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전이가 됐다며 의사들은 손을 놓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소원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아내는 A4용지 세 장이 넘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소원을 써놓았습니다.

"애들 잠자리 들기 전에 꼭 두 번씩 뽀뽀해주세요. 가족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식탁 하나 사요. 나중에 커서 절대 담배 피우지 못하게 하고요. 언제나 약속 시간 꼭 지키게 해주세요. 누구랑 다퉜더라도 꼭 화해하게 하시고, 여자친구는 정중히 대하고 양다리 데이트하지 않게 가르쳐주세요. 큰애 잠자리에 오줌 싸는 것 윽박지르지 마세요. 밤중에 오줌 줄이는 약 있어요. 이따금 해바라기를 키워보게 해주세요"

"너희들의 웃음, 엄지손가락 빠는 것, 귀 구부리는 것을 사랑했단다. 엄마를 껴안아주는 것이 더없이 행복했어. 엄마는 강둑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했지. 또 나비와 새 이름 배우는 것, 아이보리색 장미와 안개꽃을 좋아했단다. 엄마는 키 155cm, 체중은 55kg이었어. 문틀에 엄마 키를 새겨놓고 엄마를 기억해주렴."

그리고 그 어머니, 케이트 그린은 지난 1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짧은 인생을 마쳤지만 더할 나위없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냥 아무도 모르는 이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신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직도 영적으로 너무 어려서 얼마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케이트 그린의 네 살 아들도, 아니 여섯 살 아들도 어쩌면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엄마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엄마가 자신들을 그냥 놔두고 떠나버렸다고 오해를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떠난 엄마를 미워해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한다 하더라도 그 엄마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도 결코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그 자녀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그 어머니가 자녀들을 사랑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자신이 놓고 갈 수 밖에 없는 그 수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 자기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자녀들과 남편이었다는 것이 그 어머니가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숭고한 사랑은 엄마이자 아내가 떠난 다음에도 자녀들과 남편이 그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늘도 우리가운데 빛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알았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 사랑은 빛이 났고, 그리고 이제 주님을 알아가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그 사랑이 빛이 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가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때쯤 비로소 우리가 성장했구나를 알게 됩니다. 주님은 이제도 그 사랑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자라게 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3월에 예수님의 놀라우신 대속의 죽으심과 그 숭고한 사랑을 잊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그 사랑 안에서 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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