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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44행26: 8-15 우리가 핍박했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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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행26:
8-15 우리가 핍박했던 예수님_1




2012.3.11.주, 주일오전, 주제설교

*개요   [53희생] {6서신서} <d극본> [4욕구]-[5은혜]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1.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대속의 희생을 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새 봄이 찾아오는 3월달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도약과 도전의 달입니다. 사계절을 맞이하면서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에게 3월부터 시작되는 봄은 소망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학제상 새로운 학기와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은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라디오를 듣다보니 이런 사연이 들려졌습니다. 어떤 분이 음악신청사연을 올렸는데 이땅의 모든 해방된 어머니들과 함께 음악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서 아이들을 학교를 가게 되니까 어머니들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기뻐하면서 음악신청을 한 것입니다. 신청자도 역시 해방된 어머니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3월에 역시 함께 찾아온 교회절기가 있는데 그것은 사순절(四旬節)입니다. 사순절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 40일전부터 그 십자가의 고난과 괴로움에 참여하는 교회절기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절기는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에서 지키고 있지만 우리 합동교단은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칼빈이 사순절은 미신적인 의미로 변질되어 시행되고, 금식과 고행 등을 통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므로 그것이 주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완전히 폐지하였기 때문입니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4장 19-29). 이에 따라 우리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84회 총회(1999년 9월)에서는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 교회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결의하고 사순 시기를 지키지 않고 예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 만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해 보면서 다가오는 고난주일과 부활절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묵상의 시간은 다소 들떠 있을 수 있는 이 3월에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의 은혜에 푹 잠기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이 왜 우리를 위해서, 왜 우리 때문인가 하면 그로 인해서 우리가 유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얻게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과 희생의 원인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분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를 사랑하신 바로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높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2.    그렇지만 문제는 그 대속의 의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그냥 내가 산 것처럼 살아갑니다. 겉으로 노력을 할 뿐이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또는 노력도 하고 감정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볼 때 정말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요? 예수님이 문제인가요? 하나님이 문제인가요? 아니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죄를 대속받은 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진심으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그럭저럭 잘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 큰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냥 심드렁하고 말 뿐입니다.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과거에도 나와 상관이 있었고 지금도 상관이 있으며 앞으로도 상관이 있습니다. 주님이 해 놓으신 일이 달라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달을 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을 때, 주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더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얼마나 받았는가를 알게 됨으로써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그것을 더 알면 알 수록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을 깨닫는 것은 그의 놀라운 헌신과 충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어디까지 사해주셨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죄는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일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그는 아주 대표적인 대제사장들의 앞잡이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이고 괴롭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자랑과 열심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일에 동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625 전쟁때 인민군의 앞잡이가 되어서 죽창을 들고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그런 악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더욱 나아가서 멀리 여행까지 하면서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11절, 12절을 보십시오.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이 그렇게 고문과 협박을 행했고 격분함으로 핍박하였고, 더 큰 권세를 받아가지고 다메섹에까지 가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자 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악행을 열거하다보면 정말 그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악한 사람이 변화를 받아서 자신이 그렇게 미워하던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사도까지 되었을까 신기할 정도입니다.


3.     예수님은 바울이 변화되도록 모든 핍박을 다 견뎌내셨고 그중에도 가장 큰 불신을 참아내셨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어떻게 사도 바울이 과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했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다 용서해주고 어떻게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하심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가 다메섹으로 가서 계속 핍박을 하려고 가다가 큰 빛을 보고 땅에 쓰러졌는데 그 때 그에게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해서 누구시냐고 물었고 그 때 들리는 음성은 바로 그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을 때 자신의 사람들에게 받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받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죽이고 협박하고 고문하고 괴롭힐 때 그는 예수님을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예수시라고 하시지 않고,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핍박할 때 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 중에서도 인내하시면서 바울이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자리에게 거꾸러진 바울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 하면서 후회했던 일은 단지 주님을 핍박하고 괴롭게 했던 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진심으로 괴로워하면서 안타까워 했던 것은 주님을 믿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것이 제일 고통스럽고 후회스러웠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핍박하게 되고 악하게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애초에 믿지를 않았으니까 대제사장들에게 이용당하고 죽창을 든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안타까움과 후회스러움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구절이 8절, 9절입니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그의 포악함과 강퍅함은 애초에 믿지 않음에서 생겨났고 그것이 한스럽고 괴로웠던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이후에 그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전에는 누구보다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가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는 믿지 않음이 얼마나 큰 죄의 시작인 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을 때에 행했던 모든 죄악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게 견디셔야 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이 우리의 핍박을 참아주셨음을 기억하며 새롭게 주님을 바라봅시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우리가 믿지 않았었고 믿지 않고 있으며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핍박당하십니다. 믿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에 행한 모든 것이 다 대동소이합니다. 누구는 예수님께 돌을 던졌고 누구는 돌을 던지는 사람의 옷을 맡아주었지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누구는 예수님께 창을 찔렀고 누구는 창을 찌르는 사람을 응원해 주었지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전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지금도 예수님은 핍박받으시고 고통받으십니다. 또한 그것을 견디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의 피해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4…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다시 말하면 이는‘가시채를 발로 차는 것으로 인해 네가 고통당하고 있느니라’라는 뜻입니다. ‘너는 지금 가시채를 발로 차고 있다’고 말하십니다. 믿지 않음으로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그 자신을 더욱 악하고 괴롭고 극한 심판을 받게 되는 곳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사울은 바울의 이전 이름인데 그 사울은 지금 주님을 핍박하면서 더 큰 악을 행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심판을 자기 몸에 쌓고 있었습니다. 믿지 않음이 그 모든 형벌을 계속해서 쌓아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를 불쌍히 여기사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음이 얼마나 주님을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우리가 믿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주님이 희생하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과거에 주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참아주셨던 그 모든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제는 더욱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믿고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우리가 믿지 않음으로 핍박했던 예수님께 대한 회개의 삶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사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우리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믿을 때에 비로소 우리를 위해 인내하시고 핍박을 받으셨으나 견디어 내신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자가 됩니다. 그냥 믿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믿고 그 가운데서 기업을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존뉴턴은 노예상인이었지만 그가 구원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더이상 노예상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배를 처분하고 신학을 배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놀라운 찬양을 작사하였습니다.

3월에 밝고 화창하고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다가오는 4월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사순절이라는 절기가 아니라 그 절기 속에서 혹이나 생길 수 있는 외식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 속으로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더욱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더 믿지 않았음을 괴로워하며 의지하지 않았음을 후회할 때에 앞으로의 삶은 주님을 더욱 믿으며 더욱 의지하며 더욱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한 마음의 변화와 다짐이 생겨날 입니다. 이러한 결심과 깨달음이 여러분에게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감당하셨던 과거의 모든 고통은 지금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d극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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