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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희락] 14대하 30;23-27 커다란 희락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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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하 30;23-27 커다란 희락의 근원_1

 

 2014.2.2.주.주일오전.

 

*개요:    62희락, 3분석, 1오경역사서, 5은혜-6결심

 

23    온 회가 다시 칠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일을 즐거이 지켰더라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칠천을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일만을 회중에게 주었으며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는지라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온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와 유다에 거한 나그네가 다 즐거워 하였으므로

26    예루살렘에 큰 희락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커다란 희락의 근원’ 입니다. 그냥 희락이 아니라 커다란 희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락의 근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속에서 그런 큰 희락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희락은 사랑 다음에 나타나는 성경의 주제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서 희락은 사랑 다음에 나타납니다. 또한 희락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희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락은 그 이전의 사랑의 대상이 누구였는가, 무엇이었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사랑의 대상이 자기 자신일 때 희락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일 때 희락도 역시 하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커다란 희락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커다란 희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근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기쁨을 누려야만 합니다.

 

희락은 말 그대로 ‘기쁠 희’와 ‘즐거울 락’을 사용해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발견하십니까? 여러분이 발견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 바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대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여러분이 느끼는 슬픔과 괴로움이 그 사랑의 대상의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는 월요일이 제일 기쁘고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월요일은 저에게 있어서 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월요병이 있겠지만 저는 월요병이 없습니다. 대신 화요병이 있습니다. 화요일부터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제일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은 날은 언제일까요? 그날은 토요일입니다. 토요일이 제일 힘들고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잘해도 어렵고 못하면 더 어렵습니다. 잘하면 잘한 것에 대한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다음번에 그 기대치를 맞추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설교원고를 잘 만들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암기를 하거나 이해를 하면서 원고를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 중에서 좀더 새로운 묵상이 생겨나면 원고를 다시 고칩니다. 그리고 다시 암기를 하면서 머릿속에 넣습니다. 그러다가 또 고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일이 힘들기 때문에 토요일이 힘든 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는 월요일에는 가장 기쁩니다(이전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월요일에도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이 나더군요. 그래서 다시 쉬기로 했습니다). 스트레스가 있었고 그 스트레스가 사라지게 되니까 그것이 저의 희락의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희락과 슬픔도 역시 서로 반대쪽에 있습니다. 어떠한 부분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미움을 느끼게 되면 반대쪽으로 사랑이 가고 희락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슬프고 힘든 일이 생기면 그렇지 않게 되는 쪽에 바로 희락의 근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토요일에 힘들고, 월요일에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희락의 한계를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 그렇게 희락과 희락하지 않음과 다시 희락과 희락하지 않음이 교차되는 한에서는 그 희락은 제한적일 뿐입니다. 또한 아주 작은 기쁨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리적으로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그 어떤 것에 희락의 근원이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중에 던져 올리는 공과 같아서 올라가서 멈추는 바로 그 짧은 순간에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올라가기까지의 어려움이 있고 올라가서 멈추면서 희락을 느끼게 되고 다시 내려오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순간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부족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곳에 살든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할 때에 희락이 생깁니다. 또한 그와 함께 슬픔도 생깁니다. 희락을 얻게 되면 될수록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상대적인 슬픔이 생기는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것에서 희락을 가지게 되면 될수록 그와 함께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슬픔을 갖게 됩니다. 직장인이 일을 하는 것에 희락을 가지게 되면 될수록 그와 함께 일을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일에 마음을 붙이고 그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면 될수록 그로 인해서 슬픔도 같이 생겨납니다. 이말이 어쩌면 이해가 되지 않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이해가 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간에 이러한 원리는 이 세상 삶속에 분명하게 있는 진리입니다.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른 것처럼 이세상에서의 희락은 그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목이 마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희락이 있습니다. 그러한 희락을 큰 희락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희락의 근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의 희락의 양상도 달랐습니다.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온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와 유다에 거한 나그네가 다 즐거워 하였으므로

26    예루살렘에 큰 희락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그들은 유다 온 회중이었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온 회중과 그중에 거하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거주인과 비거주인을 가리지 않으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희락이 흘러 넘쳐서 나그네에게까지도 그 희락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희락은 왜 생긴 것일까요? 그 희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지금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23    온 회가 다시 칠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일을 즐거이 지켰더라”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던 놀라운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유월절 절기의 의미인데 바로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을 생각하면서 히스기야왕이 절기를 지키게 하였고 그것이 이러한 커다란 희락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희락을 비교해 보십시오. 한 가지 희락은 삶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고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얻는 희락입니다. 그런 희락은 다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항상 좋아하는 것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늘 순간의 희락을 맛보기 위한 오랜 시간의 고통이 따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놀이기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서 1,2시간씩 혹은 그 이상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기다린 시간에 비해서 얻는 즐거움은 너무나 짧습니다. 이 세상의 삶속에서 얻는 희락은 항상 그렇게 순간적입니다. 일시적입니다.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입어도, 무엇을 구입해도, 무엇을 이루어도 그로 인한 희락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을 근원으로 하는 커다란 희락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희락은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희락은 모든 사람에게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락은 하나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모든 일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행하고 계시는 일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고양시키며 확장시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면서 희락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로써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희락에 인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약간의 희락을 맛보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희락의 근원이자 창조자 이신 하나님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그 희락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놀랍고 영원한 희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전 마라토너의 과학적 원리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패트릭 마카우, 케냐)가 달리는 모습을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높이 오르지 않으니까 내릴 때의 충격도 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해야 큰 피로감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르려고 하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순간 순간의 달리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목표를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달리니 마라톤 기록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희락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희락은 세상의 그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과 상관없는 어떤 영역에서 기쁨을 누리고 즐거움을 누리면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신앙생활에서의 희락은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희락을 누리면 누릴수록 하나님의 희락은 점차 희박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희락을 추구하고 그 희락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만 하면 그런 희락이 생길까요? 기도만 하면서 살아가면, 예배만 드리면서 살아가면, 성경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면 그런 커다란 희락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도 설교준비를 하면서 희락을 누리지 못했던 때가 있습니다. 토요일이 가장 괴롭고 월요일이 가장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 희락의 근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또한 진정한 희락의 근원은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해답을 우리가 읽은 성경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

그들이 올린 기도는 그들의 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때문에 절기를 지켰고, 하나님때문에 절기중에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때문에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이 전쟁에 승리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풍년을 거둔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세상 사람들 관점에서 기뻐할 어떤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때문에 그들은 감사하였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의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닿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락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희락으로 가득차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만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야만 했는데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하늘에 올라가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하늘 보좌에 상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로 인해서 희락을 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때문에 한 것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안에서의 커다란 희락을 생각할 때 그것이 상달되고 안되고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분명 기분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가인이 자신의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처럼 전혀 유쾌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서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그래도 뭔가를 했는데, 왜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가 있지? 어떻게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안받아들여지고의 문제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화도 날 수 있겠고 좌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희락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희락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면 다음번에는 진정한 희락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역대상 13장에서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았겼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가지고 돌아오게 될 때에 주악을 올리며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법궤는 사람이 채에 꿰어서 들어아 하는 것인데 소가 끄는 마차에 올렸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마차에서 떨어질뻔 하자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잡았다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대상13: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갑자기 모두가 얼어붙었고 분위기는 침통해졌으며 음악도 중단되고 법궤도 다윗성으로 가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갔습니다. 분명 그것은 전혀 희락이 아니었습니다. 슬픔과 괴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 으로 인해 희락을 기대했지만 전혀 희락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큰 괴로움과 낙심이 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정말 자신의 희락만을 구하는 자였다면 거기서 실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찾아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사람이 법궤를 들어야 했는데 소에 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소에 싣게 되었는가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렇게 실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6:10-11 그 사람들이 그 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다윗도 블레셋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셨지만 마땅히 법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다윗은 자신의 희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희락을 위해서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대상15:12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족장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케 하고 내가 예비한 곳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두번째에는 온전하게 사람이 메서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기뻐하였습니다.

“대상15:27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28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그들은 언약궤를 메어 올려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해서 기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그속에서 그들도 함께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알게 되면 정말 기뻐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하심 속에서 그 기쁨이 한도 끝도 없이 영원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기뻐하심을 함께 기뻐하게 되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시고 그래서 영원속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항상 주님의 기뻐하심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받는 우리들의 희락인 것입니다.

 

자동차 중에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은 배터리로 가다가 속도를 내야 할때는 휘발유를 사용합니다. 두 개의 에너지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배터리에 불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휘발유를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힘과 능력은 배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옥가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내가 영원히 살아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천국에는 내가 좋아하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니까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은 다 나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진정한 참된 희락의 근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일하는 것이 즐거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기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행하는 것이 좋아서 일 때 그것은 진정한 희락이 되고 천국은 바로 그런 일을 행하는 곳입니다. 영원 영원히 말입니다. 그것은 중단되지 않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희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니까 제가 토요일마다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저를 즐겁게 하려고 그랬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힘들었던 것입니다.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아주 껑충껑충 폴짝폴짝 뛰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쳐서 쓰러지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진정한 희락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내가 행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누리는 그 기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희락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그 기쁨을 한번 누려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그 기쁨을 누리십시오. 최소한 교회일부터 하나님때문에 해보십시오. 하나님께 그 근원을 두어 보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삶속에서 또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기쁨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 속에서 한없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커다란 희락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한달이 이러한 희락으로 충만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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