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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우애] 42눅 2;28-35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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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눅 2;28-35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나눔_1
 
 2014.12.28.주.주일오전.
 
*개요:    76우애, 5복음서, 2관점, 5은혜-7실천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나누신 여러가지의 연합과 나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고민을 나누고 그리고 괴로움을 나누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나눔보다 가장 큰 나눔과 연합은 바로 고통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은 바로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육체로 느끼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 고통에 함께 참여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우애를 느끼게 됩니다. 육체로 느끼는 모든 고통에 대해서 함께 아파했던 것만큼 친밀해지고 연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연합을 우리와 함께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의 창조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창조자로 계실 뿐만 아니라 친히 피조물과 같이 되셨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처절한 육체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부활하셔서 내가 너의 모든 고통을 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진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인간에게 오셔서 인간처럼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우리와 연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죽으심을 믿고 감사함을 통해 비로소 주님과 진정으로 연합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간의 고통에 연합하심은 이미 주님의 인생의 목적으로 예비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도 아닙니다. 자아실현을 위해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위해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바로 죽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주님은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그 인생의 목표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은 사랑으로 행하셨습니다. 자발적으로 자원하셔서 그 일을 능동적으로 이루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의인이 죽는 것은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최대한의 사랑과 최대한의 순종을 가지고 이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자신의 인생의 한 부분을 소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일에 그 능력의 일부를 사용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바로 고통 속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예언되었습니다. 그 예언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고통을 위해서 오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예언이 이루어졌을 때 예수님의 행하셨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심이었고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고통받으심에 대한 예언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난 지 팔일이 되어 할례를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 메시야를 만나리라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성전을 떠나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모님이 할례를 위해서 성전에 이르렀을 때 바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도 역시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기다린 만큼 감격도 컸습니다. 시므온은 이제서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음을 찬양했습니다. 평생의 기다림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을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영광스러움은 그 의미를 알 때에만 가치있을 뿐입니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던 것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민 앞에 예비하셨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자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였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해서 온세상이 구원을 얻으며 온민족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의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시므온은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그러면서 만민 앞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분이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시는 분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우리 아기가 정말 대단한 왕이나 장군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기원전 300여년전에 등장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같은 위대한 장군이자 대왕을 꿈꾸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과 영광을 나타내줄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를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이셨습니다. 너무나 상상을 초월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다만 이해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시므온은 바로 그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눅] 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이 부모에게 축복하고 특별히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은 예수님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는 분이 될 것이었습니다. 패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음으로 인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배척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본심과 본래의 목적은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서 그들의 검은 속셈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분명한 하나님의 대적들이 될 것이고 심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패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여 예수님을 통해서 흥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게 하는 표적이 되도록 세움을 입으셨습니다. 비록 그러한 표적이기 때문에 비방을 받기도 하겠고 그 비방으로 인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세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비방의 끝에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마리아에게 한 이말은 마리아가 앞으로의 당할 마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 마음의 고통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칼은 헬라어로 ‘ῥομφαία (rhomphaia)’라고 합니다. 이말의 영어단어는 ‘a long Thracian javelin’이라는 것이고 이 의미는 ‘트라키아식의 창’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서 단순한 검이 아니고 창이 그 마음을 찌르는 것 같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창에 찔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에 찔리심으로 인해서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끊어질 듯 아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에 찔리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말은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바로 예수님이 어린 아기일 때부터 이미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거울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언을 통해서 이 아기 예수님이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힘이 없어서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가 아닌가 라는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서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과의 연합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 우리와 연합하십니다. 우리는 고통의 수준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의 연합은 우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준이 된다면 당장에 우리는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에 예수님은 어디계셨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몸이 아플 때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거기서 의미하는 것은 왜 나를 그렇게 아픈 상태로 내버려두셨는가입니다. 왜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셨는가를 묻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면 이런 아픔이 이런 고통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연합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준으로 하는 연합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의 고통을 우리가 깨달을 때 비로소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보면서 그 고통을 바로 나에 대한 것이었음을 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창이 그 몸을 찌르셨다는 알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결코 우리에게 비행기가 나아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는 우리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고 비행기가 나에게 나의 삶에 나의 생활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공항으로 나아가고 수속을 밟아서 비행기를 타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우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다 크십니다. 그 예수님에는 모든 인류가 다 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각각의 인간에게 맞춰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그 모든 다양하고도 복잡한 고통을 겪었고 겪고 있고 겪게 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통을 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예수님과 동일성을 깨닫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고통당하셨구나를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고통당하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머리가 아픈 자가, 혹은 목이 아픈 자가, 또는 가슴이 아픈 자가, 기타 배가 아프고 허리가 아픈 자가 손이 아프고 발이 아픈 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바로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겪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비로소 그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 주님께 회개하고 그 주님께 감사하며 그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놀랍고 위대한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됩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 속에서 이러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에 동참하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한쪽 편에 달린 강도였습니다.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그는 자신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동일하게 예수님과 십자가에 달려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고통과 예수님의 고통을 차별했습니다. 그 자신은 자신이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고통이었으나 예수님은 의로운 일을 하시고 의로우신 자였지만 고통당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고통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 자는 바로 그 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아까부터 계속 거기에 계셨지만 아니 그 모든 십자가형이 시작될 때부터 그 강도와 함께 하셨지만 이 강도가 비로소 그리스도를 고통 중에서 붙들었을 때에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진정한 연합은 바로 고통 중에 계시던 주님께서 그에게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을 때에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그 사람 옆에 있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편안한 곳에 계셨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연합이 오직 예수님께서 인간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붙들어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연합은 우리 자신의 측면에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고통 속에서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측면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모든 고통을 친히 당하고 계시고 우리를 기다려주심으로 인해서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 속에서 우리와 연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우애하심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모든 고통 속에서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이 한 해가 괴로웠습니까? 주님께도 괴로운 한해였을 것입니다. 내년 한해가 힘들 것 같습니까? 주님께도 내년 한해는 힘든 한해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시간대를 지내고 계십니다. 같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기준으로 연합을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 기준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진정으로 낙원에 인도해주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우리와 가장 친밀한 우애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깨닫고 경험하고 누림으로써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경험했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서 더욱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그분과 동행하게 되는 귀한 신앙인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가오는 새해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더욱 믿게 되고 알게 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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