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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경건] 40마 13; 31-33 겨자씨 한 알의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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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마 13; 31-33 겨자씨 한 알의 경건_1
 
 
 2014.10.12.주. 주일오전.
 
*개요:    74경건, 5복음서, 3분석, 5은혜-7실천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넓은 초원 위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TV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동물의 세계가 참 신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신비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인간의 세계와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보다 한참은 뒤떨어질 것 같은 동물의 세계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가족이 가족을 도와주는 것,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서 온힘을 다하는 것 이런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동물보다도 못한 인간에 대해서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동물보다 높은 인간이 원래 기본인데 금수같은 인간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 수준이 떨어진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그 수준이 하락한 상태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이 동물보다 못하다, 혹은 동물이 인간과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깨닫는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월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나은 점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인간은 죽음 이후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합니다. 그속에서 인간에게 종교가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자 신앙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관한 것은 기본적으로 오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라는 오감 이외에 영감이 있어서 그 영감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바라보려고 할 때에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를 생각하고 영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할 때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성적인 기관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성인이 되면 그 기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영원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자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태어나 살면서 바로 하나님과 교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 된 가장 근본적인 목적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려 진행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 바로 오늘 성경말씀에 나옵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이 왜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일까요? 천국이 어떻게 겨자씨 한 알정도로 작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무나 적절한 말씀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천국은 겨자씨만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와 허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 교회에 첫 발을 딛은 사람에게는 혹은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허구나 허상은 아닙니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럴 때 천국은 그러한 자들에게 아주 작은 겨자씨 만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존재감이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천국의 시작이었습니다. 천국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겨자씨는 참깨알이나 찹쌀 혹은 멥쌀보다도 작은 것입니다. 존재감으로 따지만 겨자씨는 다른 씨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이 천국의 겨자씨만한 존재감은 나중에 엄청난 것으로 자라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자란 뒤에는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됩니다. 이 놀라운 발전을 보십시오. 나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아주 우람한 나무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였고 겨자나무였습니다. 겨자나무의 시작은 아주 작은 씨였던 것이고, 겨자씨는 놀라운 겨자나무로 자라난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이와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는 아주 커다란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소망입니다. 처음에는 별볼일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너무나 볼일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러한 천국을 소망할 때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인간되게 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 귀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저와 사모가 냉전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동안 말을 가능한 하지 않는 식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들에게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냉전을 벌인다는 것을 모르게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결국 화해를 했는데 화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큰딸이 다가오더니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어요?”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이미 눈치를 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등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뒤부터는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때에는 한 문제에 대해서 첨예하게 대립할 때에는 큰딸을 불러다가 생각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곧잘 옳은 말도 하고 일리있는 말도 했습니다. 더이상 훈육만 하는 자녀가 아니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그 나라의 영광을 부인하거나 혹은 관심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주제를 하나님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먹고 잘사는가에 대해서만 몰입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런 주제에 대해서만 알려주실 뿐이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통 관심사가 이 세상에 가있는데 어떻게 저 세상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치 큰애는 엄마 아빠와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10살이나 적은 작은 애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생각은 단지 겨자씨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거대한 겨자나무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겨자씨만한 생각을 겨자나무만한 생각으로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사실 본문 가운데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밭에 심는 것입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겨자씨를 그냥 들고만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겨자씨를 그냥 서랍에만 넣어놓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겨자씨는 밭에 가져다가 심어야만 비로소 성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33절을 보십시오.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것을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으니까 그것이 다 부풀게 되어 버렸습니다. 겨자씨나 누룩이나 이것은 밭에 혹은 가루에 가져다가 심거나 넣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있긴 있지만 지금까지 전혀 자라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동일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씨는 자라나지 않았을까요? 바로 밭에 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밭이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는 직장인으로 때로는 가정주부로 어떤 사람은 배우는 학생으로 어떤 사람은 나이든 노인으로 살아갑니다. 각자의 나이에 맞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이 바로 밭입니다. 그 밭에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만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가정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 합니다. 학생은 학업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 하고 노인은 노인으로서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심을 때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만들고자 애를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경건’입니다. 그 경건한 삶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삶에 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또한 삶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도우심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을 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우리에게 주신 여러가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우리 자신을 삶의 번제로 삼아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사람에게 펼쳐지기를 소원하면서 ‘전도’합니다. 또한 그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다른 사람에게 임하기를 기대하면서 ‘양육’합니다. 그 나라에 필요한 도움이 되기를 간구하면서 우리자신이 시간을 쪼개어 ‘봉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행해지는 일들이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바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경건이란 우리가 삶속에서 우리 자신을 내세우고 높이고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직장인이 출근하고 일하고 야근하고 퇴근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하는 것처럼, 가정주부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보살피는 것이 가정을 세우기 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원하기 때문에 경건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이 겨자씨에서 시작하지만 밭에 심고 자라게 되면 겨자나무가 된다고 하셨을 때 그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는 것이 바로 그 나무가 나타내는 가장 좋은 효과였습니다. 그냥 멋있게 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새들이 와서 그곳에 쉬면서 둥지를 틀 수 있습니다. 갈곳없는 인생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고 그 의미속에서 다시한번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이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33절을 보십시오.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놀라운 변화는 가루속에 누룩을 넣은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누룩은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해버렸습니다. 이전에는 작은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커다란 부피로 커져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의미입니다. 그 이전에는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는 커다란 의미를 갖게 하는 것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질 때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커다란 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변화산에서 변화되셨을 때에 나타난 한 사건이 있습니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그 때 예수님은 이미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셔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죽었으면 더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었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며 함께 격려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자들로 나타났을까요? 그들은 경건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자였고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이었지만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던 자였고, 엘리야는 살고 싶지 않다고 죽여달라고 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경건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살아 생전에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가 되었으며 죽어서는 영원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대화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경건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는 그리고 그 경건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자들로서 세속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세상을 가까이 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관심사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토록 그 나라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가지시고 이제 그 나라를 위해서 더욱 여러분의 작은 겨자씨 한알 같은 믿음을 키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거대한 나무가 될 때까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나무 속에서 많은 갈곳 없는 영혼들이 거하게 될 것이고 바로 여러분 자신이 거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되어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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