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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절제] 46고전 9;25-27 이기기를 원하는 자의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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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고전9;25-27 이기기를 원하는 자의 절제_1

 

 2014.9.14..주일오전.

 

*개요: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대 헬라철학의 한 학파로서 스토아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학파를 창시한 제논이라는 사람에게는 허영이 심하고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늘 절제하지 못한 삶을 살기에 제논은 그를 불러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제논은 이렇게 훈계했습니다.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사가 요리할 때에 소금을 잔뜩 집어넣어도 맛이 좋단 말이냐?”

요리사가 맛을 내기 위해서 소금을 넣지 소금이 많이 있어서 넣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절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내기 위해 필요한 덕목입니다. 이러한 절제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검소나 검약, 혹은 절약정신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목표를 가지고 그 인생의 목표를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는 모습입니다. 또한 그것은 성령안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때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믿고 의지하기에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소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열매는 바로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에게 바로 그 목표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절제를 하지만 그것이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절제라면 그 절제는 썩을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한 절제라면 그 절제는 많은 것을 얻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썩을 면류관은 헬라어로 φθαρτός στέφανος (phthartos stephanos) 라고 합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월계수로 관을 만들어 우승자에게 머리에 씌워주던 그 면류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대 올림픽에 출전하는 자들의 절제를 생각해 보면 지금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준비와 절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종목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합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냅니다. 그러한 절제를 통해서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겨냈다고 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젠가 썩을 면류관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운동경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모두 썩을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될 때 우리의 삶은 허무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관절 전문의사는 말하기를, 여든 넘은 어르신들은 함께 모이면 걸을 수 있는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는 자랑은 70대까지이고 80세가 넘어가면 몸의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수고하지만 그 이후에는 오직 쇠퇴해가는 육체만이 남을 뿐입니다. 돈을 쓰는 것도 몸이 건강할 때에나 가능하지 몸이 부실하게 되고 쇠퇴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무기력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 면류관에 대해서 성경은 다른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3: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썩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그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갈 때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제의 결실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시들지 않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 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절제를 하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그 영광의 면류관을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모를 뿐 아니라 무시합니다.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차라리 썩더라도 썩을 면류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가치있고 보람있게 여겨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 자신도 얼마나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가셨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속에서 얼마나 절제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극도로 절제하심을 놀랍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중요한 장면은 바로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22: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와 자신을 죽이는 것의 부당함을 왜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죽는 것은 둘째치고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게 될 것에 대해서 왜 더욱 분명하게 더욱 확실하게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앞에 그 권능을 분명하게 나타내시지 않으셨을까요?

 

어쩌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스스로를 절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너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그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시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며 설사 예수님이 그것을 말하시고 또한 항변하신다 하더라도 저들이 회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답이 우리가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볼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썩어질 면류관들 속에서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 시들지 않는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절제하면서 묵묵히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이 주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그속에서 절제하며 또 절제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면류관인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절제하는 이유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 구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또한 그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에 대해서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폄하하고 비난하며 무시하고 외면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다투거나 논쟁하거나 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언젠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길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절제의 열매를 맺으면서 바로 예수님이 가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하는 길의 방향입니다. 그 방향은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온전한 면류관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면류관은 마침내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게 될 때에 얻으셨던 온전한 면류관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바로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14:14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예수님은 마침내 인자로서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낫은 예수님이 심판자로서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구원자이시지만 그분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며 학대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한 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두려운 심판자가 되십니다. 이렇게 마침내 얻게 되신 예수님의 면류관을 보면서 우리도 그 길을 바라봅니다. 우리도 주님이 주시는 그 면류관을 얻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절제란 향방 없는 것 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허공을 치는 것같이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절제를 위해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결과를 향해서 스스로를 절제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싸움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허상, 허공을 향해서 혼자 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그 절제는 자기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발전과 성숙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하거나 다른 일들에 참견하는 것이 절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절제를 말할 때 자신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열심히 전파하였지만 사실 자기 자신의 준비가 미흡해서 그 스스로는 도리어 버림이 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이 칭찬해주시지 않는 것이 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프로테스트(저항)’한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았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유럽 각국의 왕을 인준할 정도의 권력을 지녔고, 정권에 따라다니는 금권을 가졌으며 이를 지키는 군대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성당 공사비 때문에 헌금을 하면 죽은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 면죄부를 파는 일행이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왔을 때 이를 본 마틴 루터는 로마카톨릭의 잘못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 1517 10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붙이면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막강한 권력 앞에 면죄부를 포함해 적어도 95개 조항이 비성서적인 거짓이라고 달려들었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장 종교재판에서 정죄되고 처형을 당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셔서 옛 원수 마귀를 향해 날 대신해 싸우니 누가 당하랴며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는 재판정에서 그는나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으로 끝날 일이었으나 주님은 생명의 일을 하셨습니다. 진리 편에 서는 세력을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 루터가 피신하여 비밀의 성 안에 머물게 하시어 보호하셨습니다. 여기서 그가 성경적 투사의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계속 전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자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종교개혁의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진정한 절제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황에 대해서 이를 악물면서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두려움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가 말하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가 참된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정말 구원을 얻는 것이 참된 진리일 때 우리는 세상의 주장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절제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주님은 절제하시면서 오직 세상에 공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목표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외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달리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우리는 오직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절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 되며 그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나타나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자도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장과 발전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장과 발전이 결국 진정으로 이기기를 원하던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더욱 절제의 열매를 맺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열매가 여러분의 삶에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으로 나타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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