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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사랑] 62요일 4; 13-17 타인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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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요일 4; 13-17 타인의 사랑에서 나님의 사랑으로_1

 

 2014.1.19.주.주일오전

 

*개요:    61사랑, 4복음서신서, 5은혜-6결심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고 그가 우리 안에 거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나님의 아들이라 시인나님이 저 안에 거시고 저도 나님 안에 거느니라

16    나님이 우리를 사랑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는 자는 나님 안에 거나님도 그 안에 거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려 함이니 주의 어떠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였느니라

 

 

평지에서 높은 산을 바라보면 그 높은 산의 느낌은 그냥 막연게 엄청나다 높다 굉장다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지만 산 중턱에서 산의 정상을 바라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들게 됩니다. 산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다가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고 너무 힘들고 지쳤을 때에는 아련게 보이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 아래에서 보는 산의 의미와 산 중턱에서 보는 산의 의미가 다릅니다.

이처럼 자신의 사랑이라는 위치에서 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과 타인의 사랑이라는 위치에서 나님의 사랑을 본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자신의 사랑에서 나님의 사랑을 보면, 그 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점은 자신의 원수를 지극히 사랑셨다는 끝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이고 유한한 사랑에 비해서 너무나 한이 없고 너무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바라보면서 자기자신의 사랑에 빠진 사람이 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사랑이라는 위치에서 나님의 사랑을 보면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처음의 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산을 바라볼 때와 산에 들어올 때가 다르듯이 나님의 사랑을 멀리서 쳐다볼 때와 그 사랑을 가까이서 경험게 될 때에는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더욱 새로운 그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입니다. 산은 멀리서 볼 때에만 산을 보게 되는 것이지 그 산에 들어온 다음에는 더이상 산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대신 더 구체적이고 더 자세한 산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나님의 사랑을 멀리서 볼 때에는 원수를 사랑시고 그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희생신 무한한 사랑을 보게 되지만 그 사랑을 받아 교회생활을 고 신앙생활을 며 말씀생활을 다보면 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또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보이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의 사랑 너머로 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사랑에서 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에서 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다른 사람의 사랑에서 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면 그때 발견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 거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고 나님이 우리 안에 거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 그 위치에서 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되는 관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고 그가 우리 안에 거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나님의 아들이라 시인나님이 저 안에 거시고 저도 나님 안에 거느니라”

사도요한은 나님 사랑 속에서 우리가 나님 안에 거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예수님이 나님의 아들임을 시인면 주어진다고 증거고 있습니다. 바로 더 수준높은 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사도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쓰면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님 사랑, 타인의 사랑,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라는 복합적인 구성이었습니다. 그속에서 타인의 사랑을 말면서 나님의 사랑을 말는 종합적인 사상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단순고 평이며 일차원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더라도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기 위해서는 다시 종합적이고 복합적이며 다중적인 사상의 체계로 구현되어야만 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할 때 사도 요한이 말나님의 사랑의 새로운 점은 바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그안에 거게 되고 그가 우리 안에 거시는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임재와 동행은 예수님을 나님의 아들이라 시인고 믿는 자들에게는 원래 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면서 증거면서 그 성령의 임재를 경험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의 임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속에서 나님의 사랑을 더욱 가까이에서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고, 그러면서 나님의 사랑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나님 사랑이란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의 사랑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나님의 사랑은 의미있는 것이 됩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자신의 사랑에서 볼 때 나님 사랑은 너무나 높고 높아서 닿을 수 없는 아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사랑 속에서 나님의 사랑은 점차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면서 나님의 사랑이 더욱 깨달아지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심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비로소 우리 속에 몸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고산이 많이 있는 네팔에 가서 종종 등반는 어떤 산악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등산을 기 위해서 네팔에 입국을 면 체류비자와 트래킹비자를 받게 되는데 이 트래킹 비자의 기간이  등산려는 곳의 높이와 상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높이의 산을 오르려고 한다라고 면 그에 해당는 비자기간을 받아야 한답니다(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면 1인당 10,000불이 든다고 합니다). 비자기간만큼 돈을 내야 기 때문에 혹시 요행을 부려서 짧은 시간에 높이 올라갔다 오면 안될까 생각면 큰일이 납니다. 왜냐면 높은 산지에 적응을 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무시고 빨리 움직이면 고산병에 걸리게 된답니다. 고산병의 증상은 멀미와 두통증상입니다. 다시 말면 몸이 적응이 되면서 비로소 그 높이에 적응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자신의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사랑을 경험해 볼 때에 비로소 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적응을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전도는 사람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가르치고 돌보며 기도해주는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님의 사랑은 그냥 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님을 사랑나님의 사랑을 경험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속에서 나님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의 은혜를 깨달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에 문제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이 부족했거나 혹은 그 사랑이 변질되어서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된 사람이 있다면 나님의 사랑이 힘들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그것을 다시 회복고 올바르게 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이 다시 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고 올바른 길로 나님의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랑을 경험해 봐야 고 그래야 그 다음에 나님의 사랑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랑을 받는 것이 그렇고, 내가 그 사랑을 주는 것이 그렇습니다. 타인의 사랑을 받아봐야 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가 있고, 타인의 사랑을 주어봐야 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사랑을 거쳐서 나님의 사랑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교회생활을 며 신앙생활을 며 다른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과는 달리 원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고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고 자선사업을 고 남모르는 선행을 고 기부를 고 보이지 않는 천사의 역할을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도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해서 행기도 고 직장에서 그렇게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배려기도 며 학교에서 소외받는 친구들을 잘 챙겨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자기자신 보다도 아내와 남편과 아들과 딸과 부모님을 잘 섬기는 정말 칭찬받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의 사랑이 나님의 사랑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쩌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나님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박애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이 더 좋게 보여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보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푼 그 어떤 사람을 더 추앙고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며 더 위대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사랑과 나님의 사랑의 커다란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님의 사랑은 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며 다른 사람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님의 사랑은 나님께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16,17절 말씀입니다.

16    나님이 우리를 사랑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는 자는 나님 안에 거나님도 그 안에 거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려 함이니 주의 어떠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니라”

특히 이 부분에 주목해보십시오. ‘주의 어떠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많은 좋은 일을 셨지만 오히려 배척을 당셨습니다. 주님은 배고픔을 해결셨고 병자를 고쳐주셨고 귀신을 쫓아주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했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어떠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고 비판받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한다고 지만 좋은 소리 못들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별로 티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더 많은 비난과 비판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심판날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 담대함은 바로 우리를 사랑시는 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왔습니다. 또한 그 담대함은 그 사랑에 화답함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시는 나님을 믿을 때 그것은 나님께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시는 나님을 거부지 않을 때 우리는 나님을 믿고 따르며 사랑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는 사랑이 나님을 사랑는 사랑보다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지는 모르지만 나님의 사랑과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님을 사랑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지는 모르지만 나님과는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나님 안에서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를 사랑는 자들을 심판날에 붙드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는 것보다 나님을 사랑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재벌 록펠러는 그의 엄청난 부와 엄청난 기부와 그리고 엄청난 신앙생활로 유명합니다. 그는 전세계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재산이 미국 전체의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한 800조 정도 된다고 합니다. 빌게이츠가 70조 정도 됩니다.) 그와 함께 그는 엄청난 기부를 기도 했습니다. 현재 뉴욕시민전부가 사용는 수도요금은 록펠러가 기부한 돈으로 공짜로 사용고 있답니다. 그외에도 각종 자선 단체와 각종 대학과 그 대학의 장학금으로 록펠러의 기부한 재산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더 기억되는 것은 그의 신앙입니다. 어려서부터의 십일조생활과 나님께 대한 진실한 신앙심, 그리고 기도나님께 매달릴 때 그가 운영던 광산에서 터져나온 석유 등은 모두 그의 나님께 대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부 록펠러같은 부자나 기부천사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록펠러와 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국 그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부자였기 때문에 받는 수많은 비판과 기부천사임에도 불구고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들에 대해서 그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아무리 착게 살아도 비난는 사람들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혹은 더 잘못을 해서 인간은 항상 이런 저런 죄를 짓게 됩니다. 그것을 결코 다른 사람의 사랑이 덮어줄 수 없습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는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지만 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님은 그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으시고 모든 선악간에 온전게 판단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심판의 날에 담대할 수 있는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심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며 그 근거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담대함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애초에 우리가 나님께 속한 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였느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함이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적선며 봉사며 기부는 것이 죄에 대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때문에 행는 사랑이라면 그러면 그럴 수록 더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때문에 는 사랑이라면 그러면 그럴 수록 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의 한계를 넘어선 진정한 나님의 사랑은 나를 사랑신 그 나님을 사랑는 것입니다. 내가 억지로 나님을 사랑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극히 사랑신 그 나님의 의지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들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믿음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만이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우리들에게 나님은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나님의 사랑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더욱 나아가 나님 바로 그분의 사랑으로 올라가야 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 또 다시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경험고 실천할 수 있는 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되어질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사랑에 국한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님의 사랑으로 올라가야 겠습니다. 그 나님의 사랑 속에서 비로소 심판 날에 담대해지며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되는 놀라운 신앙의 시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에 이러한 온전한 사랑이 나타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우리의 믿음생활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생활에 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실현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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