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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충만] 42눅22; 42-44 땀이 피가 되는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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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눅22; 42-44 땀이 피가 되는 충만_1

 

 2013.11.24.주.주일오전.

 

*개요:    55충만, 4복음서신서, 3분석, 4욕구-5은혜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나이다 시니

43    사자가 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시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충만함을 경험며 변화되는 여러가지의 예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것과, 나아만 장군의 썩어가는 살이 새살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가장 완전한 질적변화는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되는 변화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는가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나님으로 충만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 자체가 쉽게 납득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어떻게 그것이 예수님께서 나님께 나아가시는 충만이 되느냐고 의아해 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곧 예수님은 나님께 나아가서 충만을 경험해야만 는 분은 아니시지 않느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나님과 동등신 분이라서 따로 충만이 필요지 않은데 어떻게 그분이 나님께 나아가서 충만해지시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기도한 것은 그냥 간절히 기도한 것이지 그 기도 중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 더라도 그것을 충만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지 않느냐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충만을 생각한다는 것에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온전한 충만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충만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바로 예수님의 이 모습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지금 기도의 어려움이나 기도의 불편함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원’과 ‘아버지의 원’ 사이에서 씨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나이다 시니”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괜찮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워달라고 간구십니다. 이 잔이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뜻이어든’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 βούλομαι ](boulomai)이고 영어로는 ‘if you are willing’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허락시면, 아버지가 뜻신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워달라고 간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는 십자가의 처절한 고난을 앞두고서 그 고통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 괴로움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시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때를 위해서 이세상에 오셨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러나 현실적인 고통과 괴로움 앞에서 그 잔이 옮기워지게 되기를 기도십니다. 이러한 기도가 바로 예수님께서 정말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참된 인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 것 같은 그런 모진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와 동일게 육체와 마음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보다 고통도 덜 느끼고 슬픔도 덜 느끼는 사람, 더 의지가 강고 독고 강인한 사람, 보통사람들은 다 피는 일을 오히려 자신이 다 찾아서 도맡아서 그 어려움을 다 감당해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초인이다, 철인이다, 인간 그 이상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에 반해서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숨을 내쉽니다.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두려워 합니다. 무서워 합니다. 못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바로 제가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나님이 허락신다면, 이 잔을 옮기워지게 해달라’고 기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분명히 그렇게 기도셨습니다. 왜냐면 그분도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고 어렵고 힘드는 일을 주저는 바로 연약한 한 사람의 인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연약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주님은 그 다음의 것도 기도셨습니다. 단지 잔을 피게 해달라고만 기도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잔을 옮기워달라는 기도만 계속 반복셨다면 어쩌면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끝내 잔을 피려는 마음만 계속 고수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적합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따르기를 원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나이다 시니”

 

예수님이 원신 것은 자신의 원을 성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원이 이루어지기를 원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는 것에는 잔이 옮기게 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고 더 핵심적이고 더 우선적으로 원시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의 원을 이루려고 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이루려고 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애초에도 아버지의 원을 이루려고 셨던 것이며 지금도 아버지의 원을 이루고자 시는 마음이셨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가족의 요구만을 들어주고 살아왔다고 생각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느날 가족들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들의 요구만을 들어주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원는 것을 할거다!’ 결혼한 이후로 줄곧 배우자의 원는 것만 들어주고 살아왔다고 생각한 남편이나 아내가 어느날 단호게 말합니다. ‘이제까지는 당신 이야기만 듣고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내가 고 싶은 것을 할거야!’ 평생 남의 눈치만을 보면서 다른 사람 자는 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한 형제, 혹은 자매가 이렇게 결심합니다. ‘이제는 남의 눈치 안보고 내가 정말로 원는 것을 면서 살아야지!’

그렇다면 그들의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정말 남이 원는 대로만 살았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자기가 원는 것은 나도 지 못고 살았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자기가 원는 대로 살았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 반대에 부딪쳐서 더 많이 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자기 원는 대로 살거라는 말은 결국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많이, 내가 못는 것 없이 더 자유롭게 살겠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매여 살았던 것 뿐이고 앞으로는 그 묶인 것을 끊고 맘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속에서 그 아버지,어머니는 가족들이 정말 원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고 싶은 것을 못는 것만 생각했지 정말 어떤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주기를 원했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평생 배우자의 뜻만 따랐다고 말는 남편이나 아내도 정말 자신의 배우자가 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더 사랑이 많고 더 믿을만 며 더 소망이 넘치는 남편이자 아내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선한 면은 다 외면고 끊임없이 자기 원는 것만을 추구려고 할때 항상 부딪치고 항상 다투며 항상 싸웠을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에는 자기 원는 것을 겠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전에도 자기 원던 것을 했고 앞으로 자기 원는 것을 는 것 뿐이지 그 이상도 이도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평생 남의 눈치만을 보며 살았다고 말는 형제, 자매는 어떤가요? 남의 눈치속에서 결국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남의 눈치를 보며 평안을 얻을 수 있었고, 남의 눈치를 보며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남의 눈치를 보며 괜찮은 사람인 것 처럼 행동했다면 그 역시 자기가 원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원지 않는대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이런 식으로 혹은 저런 식으로,  대놓고 혹은 소극적으로 자기 원는대로 살아갑니다. 길거리에서 노숙을 한다 더라도 자기 원는 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죽지 않는 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고, 설사 스스로 죽는다 더라도 죽는 이유는 자기 원는 것을 이루고자 죽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주님은 자기 원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자기 원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기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이 분명히 ‘잔을 내게서 옮기워달라’고 기도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는 ‘아버지의 원’을 이루기를 원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간절한 원함이 더 컸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기도셨습니다. 자기 원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아버지의 원을 이루려고 면 할 수록 자신의 원이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아버지의 원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정말로 원시는 것은 아버지의 원이 자신의 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기 싫어서 억지로 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이 다 사라지고 아버지의 원만 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이 바로 자신의 원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원을 내 원처럼 이루게 되기를 원십니다.

 

두 개의 원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이 두 개의 원은 서로 겹치지 않습니다. 서로 크기가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원이 완전히 일치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두 원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 이제 땀이 피가 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나님 아버지의 원이 있고 여기 아들 예수님의 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고자 합니다. 그 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기도십니다.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십니다. 그 기도속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원이 내 원이 되기를 원셨습니다. 내 원이 아버지의 원이 되기를 원셨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신을 포기고 아버지 뜻대로 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히 노력는 아들이 되시기를 원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이러한 일치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나님과 예수님은 온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으로 오신 다음에도 이러한 일치를 이루기를 원십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신으로서의 나님과 소원의 일치를 이루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눈물을 흘려 기도셨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일이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원셨기 때문에 주님은 힘쓰고 애쓰셨습니다. 더욱 더욱 더욱 간절게 기도셨습니다.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너무나 그것을 간절히 기도셨기 때문에 주님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피방울은 슬픔의 피방울이 아닙니다. 고통의 피방울이 아닙니다. 주님이 모범이 되셔서 인간이 어떻게 나님의 충만을 누려야 는지를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나님 아버지께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간절한 땀과 그 간절한 피방울로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피방울 같이 되었다라는 것이 맑은 땀방울이 너무나 간절함과 너무나 애씀을 통해서 진고 굵어져서 마치 피가 나온 것 처럼 되어졌다는 뜻입니다. ‘피땀흘려서 일을 했다’는 우리말의 표현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나님 아버지의 소원과 일치되기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이 소원을 나님께 올려드렸다고 말였습니다.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심을 인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강림시기 전 늘보좌에서 나님과 나누셨던 그 모든 연합과는 또 다른 의미로 주님은 이 세상에서 육체에 계실 때에 ‘소원’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 속에서 아들의 소원과 아버지의 소원이 일치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두 원은 일치가 되었고 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이 더이상 피할 잔이 되지 않았고 감당할만한 잔이 되었으며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자 했을 때 온전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나님 아버지의 더할 나위 없는 영광되심과 아들 예수님의 충만함이 바로 그 기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갖는 모든 고민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땀이 피가 되는 충만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원을 이루려고 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님으로부터 도망가게 되지만, 예수님은 나님 안에서 온전한 충만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십니다. ‘너희도 나님의 충만을 사모라’고 십니다. 

“46    이르시되 어찌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시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는 나님께 잡혀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나님께 붙들려 산다고 말합니다. 그런 생각과 말들을 들으며 우리는 시험에 듭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도망가려고 합니다. 학교를 그만두려고 고, 집을 떠나려고 며, 직장을 그만두려고 고, 가정을 떠나려고 고, 일탈을 감행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예수님의 충만을 경험해야 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그 땀이 피가 되도록 나님을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온전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땀이 피가 되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땀이 피가 되게 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충만을 사모합시다. 예수님이 나님으로 인해서 충만해지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당면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나님 아버지를 바랍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의 충만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심 속에서 새롭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을 사모셨던 예수님을 기억면서 그분의 소원으로 가득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나의 원을 추구했던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 나의 원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 원는 것을 사모함으로 진정한 나님 안에 있는 충만을 경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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