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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1창 6; 5-14 세상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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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 6; 5-14 세상의 죄악에 대한 나님의 근심_1

 

 2013.9.8.주. 주일오전.

 

*개요: 주제설교-희생 {1오경역사서} <3분석> [2유형]-[3감정]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사 마음에 근심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나님과 동행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온 땅이 나님 앞에 패괴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사람들이 걱정고 근심는 것은 안좋은 면이 있습니다. 지만 이러한 걱정이나 근심이 항상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걱정거나 근심는 것이 때로는 좋은 경우가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학생이 시험걱정을 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시험공부를 고 대비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인이 업무나 맡은 책임에 대해서 근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잘 대비고 노력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자녀를 위해 걱정고 근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면 그로 인해서 부모님들은 자녀를 위한 좋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근심는가’입니다. 내가 근심는 분야가 잘못되었을 때 그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합니다. 그 걱정는 분야가 안좋은 것일 때 그 걱정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집니다. 동일게 근심을 기는 지만 좋은 것을 근심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나쁜 것을 근심면 나쁜 결과가 나옵니다. 이러한 경우는 삶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운동을 는 것은 몸에 이롭지만 노동을 는 것은 몸에 해롭습니다.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무리게 물건을 나르고 옮기고 는 것은 몸에 안좋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원리를 발견게 됩니다. 내 수준에 맞는 걱정과 근심은 내 삶을 풍요롭게 지만 내 수준을 넘어서는 걱정과 근심은 내 삶을 황폐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때로 내 수준에서 마땅히 해야는 걱정보다는 내 수준을 넘어서는 걱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수준은 올라가고 올라가서 나님의 수준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나님에 대해서 걱정기 시작합니다. 과연 나님이 잘시는 것인가? 나님이 실수를 지 않으실까? 나님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러한 지나친 걱정은 결국 우리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님을 자신보다 낮은 자로 생각는지 모릅니다. 나님을 위협적이며 불안고 조마조마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님보다 더 높고 위대며 영화로운 자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자신은 누추고 보잘것 없는 자로 여기면서도 나님은 자기보다 더 못한 자로 말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은 존재지만 나님은 존재지도 않는 허상이라고 말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만 우리가 정말로 해야 는 일은 내가 나님보다 높은 자가 되어서 나님을 걱정는 것이 아니라, 나님 아래로 내려와서 나님의 걱정에 동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나님을 올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보다 높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높으신 위대고 영광스러우신 나님으로부터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나님의 근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죄악을 저지르고 항상 모든 행사가 악다는 것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사 마음에 근심시고”

 

나님이 근심시는 것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담과 와 이후로 선악에 대한 온전한 자유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날때부터 악했고 자라나면서 악해졌고 죽어가면서 악을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님의 근심이었습니다. 인간은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서 언제나 선택할 때에는 오직 악과 더 큰 악 중에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악과 더 큰 악 중에서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더욱 악해졌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함이 나님의 근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님은 땅위에 사람을 만드셨음을 한탄셨습니다. 한탄셨다는 것은 슬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님이 근심시고 한탄시는 것은 바로 인간의 악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인간이 이렇게 악게 된 것에 대해서 슬퍼고 괴로워셨습니다.

 

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사람이 만들어내는 악으로 인해서 나님께서 괴로워신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직접 만든 그 무엇인가로 인해서 괴로워게 된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시작한 어떤 일이 나중에는 애물단지가 되어서 근심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개를 키우다가 개가 죽은 적이 있고, 병아리를 키우다가 죽은 적이 있고, 물고기를 키우다가 역시 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항상 슬픔이 컸습니다. 죽은 사체를 처리해야 는 것은 마음이 무거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이 모든 일은 내가 직접 그렇게 생명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괴로움이 덜했습니다. 지만, 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나님은 이 모든 일에 스스로 심판을 결정셨습니다. 창조주이셨던 나님께서 심판자가 되셔야만 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인간을 자신이 죽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고 또한 심판자이신 나님께는 공의를 해야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에 대해서 나님은 이렇게 말씀셨습니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느니라”

 

주님은 죽은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이일을 행한 가인을 처벌셔야만 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죽이셔야만 나님의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이 괴로움 속에서 나님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십니다. 예레미야18장에는 자신이 만든 그릇을 깨뜨리는 토기장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모습을 보게 신다음에 말씀십니다.

“렘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지 못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거나 멸리라 한다고 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였던 재앙에 대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리라 한 선에 대여 뜻을 돌이키리라”

 

결국, 나님께서 더 중요게 생각시고 걱정며 근심시는 것은 인간이 악에서 돌이키는가 돌이키지 않는가입니다. 그가 나님을 찾는가 찾지 않는가 입니다. 나님을 찾을 때 그는 악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지만 나님을 찾지 않을 때 그는 악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게 되는 것을 주님은 근심십니다. 걱정십니다. 이러한 나님의 걱정과 근심에 대해서 나님은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기를 원십니다. 나님의 걱정과 근심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그 걱정과 근심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걱정과 근심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보십시오.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나님과 동행였으며”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세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나님과 동행했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나님의 근심과 걱정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나님이 걱정시는 것을 걱정나님이 근심시는 것을 근심셨습니다. 만약 그가 나님이 걱정시지 않는 것을 걱정나님이 근심시지 않는 것을 근심했더라면 그는 나님과 별로 상관이 없는 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나님의 근심과 걱정에 대해서 동참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님은 노아에게 자신의 근심과 걱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3절입니다.

13    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리라”

 

나님께서 홍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셨을 때 노아는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나님의 근심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함에 대해서 나님은 진심으로 슬퍼셨습니다. 나님의 땅에 나님이 만드신 자의 강포가 가득게 되고 그것을 사탄이 기뻐고 즐거워는 것에 대해서 나님은 괴로워셨습니다. 이제 나님께서는 그로 인해서 사람을 멸시는 것입니다. 그 슬픔에 대해서 노아가 이해고 받아들였을 때에 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진정한 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라”

 

세상이 멸망할 것인데 왜 노아에게는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셨을까요? 세상이 심판을 받을 텐데 왜 노아에게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방주를 짓고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안팎에 칠라고 셨을까요? 나님은 그 슬픔과 괴로움 중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살릴 생각을 셨던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지만 그 가족들은 의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만 노아가 의인이었기에 그 가족들이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나님의 근심과 걱정에 동참는 자였기 때문에 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시고 그의 가족을 살리실 생각을 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이 의인이 되기 때문에 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많은 동물들을 살리실 생각을 셨습니다. 다시 새롭게 창조시는 것보다 의로운 노아와 그 가족들을 통해서 그 의로움의 혜택을 받게되는 동물들을 생각신 것입니다. 정말로 노아는 나님의 근심에 동참했고 그로 인해서 그 가족과 많은 동물들이 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첫번째 심판을 면했던 인류와 이 세상의 모든 기식있는 생물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두 번째 심판을 앞두고 있는 자들로서 아직도 나님의 근심시는 것이 무엇이고 나님의 걱정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 못한다면 노아의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나님을 생각했고 나님이 잃어버리시게 되는 모든 인류와 모든 생물들을 생각했습니다. 다 살릴 수는 없어도 나라도 살리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나님을 생각면서 나님이 잃어버리시게 되는 이 세상 사람들과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절망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님의 근심에 동참라는 것은 나님 이상의 근심에 빠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님의 근심 속에서 우리가 해야 는 일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그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칠한 이유는 그 방주가 동물들을 싣고, 홍수를 견뎌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해야 는 일은 믿음을 갖게 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살게 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님을 바라보게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성경에 예고된 두번째 불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휴거를 받고 들림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0년 11월에 연평도에 포격이 일어나고 그해 12월에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되던 때 북한은 훈련이 시작되면 공격을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훈련은 시작되었고 정말 북한이 공격을 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한강에서 산책을 고 있었는데 여의도까지 가서 잠시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이 북한이 공격을 할 지도 모르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두려움과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공격을 게 되면 이 서울늘이 핏빛으로 물들겠구나 는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나님께 달린 것이니까 나님께서 뜻시는 대로 이루실 거야라는 생각을 게 되니까 다시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내게 맡겨주신 신앙에 관한 일들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니까 또 마음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삶의 위협들이 새롭게 신앙의 계기가 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나님이 진정으로 슬퍼시고 걱정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근심을 생각고 기억한다면 우리가 정말로 해야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잊어버렸던 약속을 기억해내는 것처럼 우리는 나님께서 이 세상의 심판받음을 슬퍼시고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한 사람이 되어야 고 이 세상을 구원는 또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짓는 방주가 구원의 방주가 되고 우리가 이루는 믿음이 구원의 열쇠가 되어지고 우리가 세우는 교회가 구원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나님의 근심을 기억고 그 근심에 동참나님이 기뻐시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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