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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인내] 40마26;36-46 잔을 거부하시지 않는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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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마26;36-46 잔을 거부시지 않는 인내_1

 

 2014.4.6.주.주일오전.

 

*개요:    64인내, 5복음서, 1적용, 5은혜-6결심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고 슬퍼

38    이에 말씀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옵소서 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도다 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나이다 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타임머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공상과학영화에 종종 나오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는 기계입니다. 이 기계를 통해서 한 사람이 과거로 갑니다. 혹은 미래로도 갑니다. 그렇게 과거나 미래로 가서 그 상황에 개입을 해서 사건이나 상황을 바꿉니다. 그렇게 시간을 바꾸는 것은 그렇게 오래된 과거나 먼 미래가 아니어도 됩니다. 단 일주일 전, 혹은 한달 전으로 돌아가서 있었던 사건이나 상황을 바꾸기를 원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더 큰 유익과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상력과 소망은 여러가지 관련된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동과 관련된 모든 바램은 이미 존재는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바탕으로 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되어지고 진행되고 존재는 모든 것에 대한 어떤 식으로든지의 부족함이 그러한 시간이동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 되어진 모든 것이 나에게 최고의 순간이자 가장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면 결코 그것을 다시 바꾸고 싶어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1등을 했고, 내가 금메달을 땄으며, 내가 승자가 되었는데 그 경기를, 그 상황을, 그 시합을 다시 라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좋아겠습니까? 그래서 시간이동과 관계된 모든 간절한 바램은 오직 되어진 모든 것에 대한 불만족에 근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루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그 결과가 자신의 입장에서 좋지 않을 때 관련된 사람을 원망합니다. 연관된 사건을 후회합니다. 관련된 상황을 불평합니다. 왜 필 그 사람이 그런 일을 그런 시기에 했을까라고 생각면서 괴로워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괴로움 속에서 시간도 바꾸고 싶고 다른 시간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지만 그럴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지 못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주관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님께서 이 모든 일의 바탕과 근거가 되십니다. 그 말이 나님께서 악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님은 선과 악의 모든 일이 일어날 때에 그 일이 애초에 존재할 수 있게 역사신 주관자가 됩니다. 인생이라는 스케치북에 어떤 악한 것이 그려지기도 지만 나님은 그 악한 것을 오히려 선한 것이 되도록 바꾸어 가십니다. 그와 같이 나님의 분명한 섭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단지 지금 현재 안좋은 것, 악한 것, 후회되는 것을 부정거나 부인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 뒤에 더 크신 나님의 섭리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 더 이상 지난 과거와, 지금의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를 부인거나 회피지 않고 그곳에서 올바르게 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서 구원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은혜를 주신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우리가 발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분의 희생과 용서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인내를 발견합니다. 그 인내는 자신에게 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거부시지 않는 인내였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신 인내였습니다. 우리가 이 4월에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가장 중요한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였는가 면 그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온 세상은 간절히 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님의 선시고 온전시고 기뻐시는 뜻이었습니다. 지만 그일은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고민과 괴로움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시러 가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함께 세배대의 두 아들인 요한과 안드레를 데리시고 나아가셔서 기도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괴로우시다는 것이었습니다. 37절입니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고 슬퍼

38    이에 말씀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시고”

주님께서는 고민고 슬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말씀시기를 고민여 죽게 되었다고 셨습니다. 그 괴로움 속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그와 함께 깨어 있기를 원셨습니다. 함께 그 괴로움에 동참해 주기를 원셨습니다. 이러한 바램으로 주님은 제자들보다 조금 더 나아가셔서 혼자 기도셨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주님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이 스스로 고민여 죽게 되었다고 시는 말씀은 그렇게 죽게 될 정도의 괴로움과 싸우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극복고 이겨내기를 원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모든 고민과 슬픔, 괴로움과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시고 고자 셨던 것은 아버지께 기도는 것이었습니다.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옵소서 시고”

주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서 간절게 기도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 늘을 우러러 기도시던 것 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은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셨습니다. 참된 인간으로서 보통 사람이 느끼는 괴로움과 고통이 주님께 있었습니다. 다가올 모든 어려움으로 인해서 인간이 느끼고 경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은 ‘잔’이라고 표현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예상되는 모든 괴로움이 임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본능적이고 마땅한 기도조차도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옵소서라고 간구셨습니다. 주님이 원시는 것이 이 잔이 지나가게 되는 것이었지만 주님이 더욱 더 원시는 것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주님은 괴로워셨고, 또한 그 때문에 그 모든 괴로움을 참으셨습니다. 그렇게 참으시는 인내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간절게 주님께 기도셨던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초에 인내라는 것은 원지 않는 일을 해야 만 할 때에 생겨납니다. 나는 쉬는 것을 원고 나는 편안한 것을 원고 나는 즐거운 것을 원지만, 쉬지 않아야만 고 편지 않음을 견뎌야 고 재밌지 않지만 그래도 참아야 할 때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게 됩니다. 그 인내를 통해서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아예 그냥 모든 것을 그만두어 버리면 안될까요? 인내는 것이 힘들어서 그냥 인내기를 그만두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내가 원는 것은 이룰 수 있지만 아버지가 원는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그것을 원지 않더라도 참아야만 는 것입니다.

 

저희 둘째는 지난 주에도 유치원에 가면서 두 번이나 울었습니다. 유치원에까지는 잘 갔지만 막상 교실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울음을 터트리면서 안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으려고 니? 면 여러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친구들이 자기 뜻대로 안해주어서도 그렇고, 엄마를 보고 싶어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어쩔 때에는 아빠랑 헤어지기 싫다고기도 합니다. 집에 있고 싶다고도 고 힘들다고도 합니다. 여튼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유치원 교실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 다음에 인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네가 이렇게 원는 대로 고 싶어면 엄마 아빠가 원는 일을 지 못는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네가 집에서 놀기만 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배워나가기를 원한다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저희 딸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마음이 좀 진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아빠 말 잘 듣고 오늘 잘 참으면 아이스크림 사줄꺼야?’ 물어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그럼, 사주고 말고’ 말을 잘 들었을 때 그에 따른 보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인내에의 순간이 우리 삶속에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학교가기 싫어는 아들을 어머니가 붙들고 깨우면서 말합니다. ‘얘야 어서 학교가야지 네가 교장이잖니’ 교회 가기 싫어는 남편을 아내가 깨우면서 말합니다. ‘여보 얼른 교회가야지요 당신은 목사님이잖아요’  집에 들어가기 싫어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 ‘얘, 빨리 집에 들어가. 네가 엄마인데 가족을 돌봐야지.’

이런 모든 상황들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내가 원는 것’과 ‘나님이 원시는 것’ 사이에서 씨름을 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내가 원는 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 인으로서 그보다 나 더 높은 ‘나님이 원시는 것’을 면서 살아갑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어떻게 이 고민을 극복셨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온 잔을 거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잔이 오기 까지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행셨던 모든 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맞이시기까지 주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살아오셨습니다. 30년간의 사적인 생애를 사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처녀로 잉태였습니다. 주님이 나실 때 천군과 천사가 찬양을 였고 목자가 찬양을 했으며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드렸습니다. 바로 이 잔이 오기까지 모든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결코 시간이동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그 모든 것은 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미 이루어진 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인내를 이루고자 할 때, 이제 필요한 것은 감정을 이겨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앞으로 있게 될 고통과 괴로움이 깨달아집니다. 그것이 더욱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 알수록 미리 겪는 괴로움도 커져갑니다. 그래서 자연히 내가 원는 것과 나님이 원는 것 사이에 갈등과 감정이 생겨납니다. 바로 아버지가 원는 것에 대한 모든 마음과 내가 원는 것에 대한 모든 마음 사이의 갈등이 우리 속에 요동치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내가 원는 것에 대한 마음을 내리 누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를 원는 마음을 조금씩 버립니다. 내가 편안기를 바랬고, 내가 무엇인가 얻기를 바랬고, 내가 다른 사람들앞에서 좋게 나타나게 되기를 바랬던 마음을 버립니다. 이 과정을 면서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변화되어져 갑니다. 지만 그 일은 결코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나님을 바라볼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딸은 결코 혼자서 새로운 마음을 먹고 유치원교실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호소였고, 저도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에게 말면서 유치원 한 구석에서 그러고 있으면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자면 일종의 교통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통을 통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서 그래서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면서 우리의 괴로움을 말씀드리고 우리의 원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면 주님도 역사십니다.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에게 설명십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게 십니다. 이치가 이해되기도 합니다. 나님의 원시는 것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구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교통게 됩니다. 형식은 기도는 것이지만 그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욕심이 사라지고 주님께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 기도를 통해 온전한 응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을 세번이나 반복셨습니다. 기도셨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다가 또다시 기도셨습니다.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나이다 시고”

그 다음에 또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다가 다시 세번째 기도셨습니다.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신 후”

그 모든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은 명확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원시는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셨습니다. 더이상 잔이 지나가기를 원는 마음이 존재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은 그보다 더 큰 마음이었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는 마음에 묻혀버린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셨습니다.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이 받으시는 잔은 바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원시는 것은 바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 상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님이 원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주님은 함께 가자고 십니다. 바로 그 잔을 향여 나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그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진 잔을 거부지 않는 인내입니다. 그 인내의 모습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함께 가자고 십니다. 우리가 그 인내를 함께 따라갈 때에 그것은 주님께 나아가는 인내입니다. 내가 원는 것을 버리고 주님이 원시는 것을 붙드는 인내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시는 인내입니다. 그 인내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가는 자들이 되고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의미게 본능적인 우리의 원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온전며 아름다우신 주님의 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이 4월에 주님의 인내를 기쁨으로 따라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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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경적용
3.마음변화
4.변화방법
5.신앙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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