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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사랑] 66계 1; 9-16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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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9-16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_1

  

 

  

2019. 4. 14. . 주일오전.

  

 

  

*개요:  예수님과의 만남, 56충만-61사랑, 2분석, 6서신서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오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어떤 상황에서 쓰게 되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함으로 인해서 유배를 당해서 밧모라는 섬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 주일에 성령에 감동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음성은 그의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주변환경의 영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섬에서 갇혀 지내고 있었지만 오히려 더 큰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9,10절입니다.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그런데 그가 어떻게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사실 그것은 이전에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이유는 다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애초에 무엇이 먼저였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렵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먼저 나타나셔야 합니까? 아니면 내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여기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둘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조금씩 움직여 나가면서 예수님과 내가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그 관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성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은혜를 주셨고 그럴 때 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반응을 합니다. 그러면 그 은혜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다시 좀더 큰 은혜를 주시고 그러면 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좀더 큰 반응을 합니다. 이러한 식으로 계속 지속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게 됩니다. 한번에 모든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관계가 진전되어지고 그래서 나중에는 아주 친밀한 관계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집에서 딸이 키우는 햄스터와 어느 정도 관계를 쌓았습니다햄스터는 눈으로 대상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맞춰도 엉뚱한 곳을 보기 일쑤이던 햄스터는 사실 냄새에 더 민감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먼저 손의 냄새부터 맡게 해 주었습니다. 그 전에 무조건 손으로 잡을 때에는 찍소리를 내면서 거부하던 햄스터는 먼저 손의 냄새를 맡고 주인임을 확인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안심하고 손 위로 올라왔습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하고 나니 이전보다 더 햄스터와 관계가 가까와 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자율적인 존재가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율적인 존재는 무엇이든지 간에 상호작용을 통해서 관계를 형성합니다. 한번에 모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관계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신앙적 관계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에 하나님을 지각하고 깨달을 수 업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면에서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한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점진적인 이해의 발전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더욱 알게 되는 사도 요한의 이해 과정을 보십시오.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는 자신에게 들려지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보려고 돌아섰을 때에 제일 먼저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그 음성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었는데 그 예수님이 한눈에 팍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일곱 금 촛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일곱 금 촛대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면 그 뒤에 있는 예수님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촛대 사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20절에 나온 대로 일곱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를 볼 때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들 사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각 교회는 각각의 특이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 정도를 모아 놓으면 그 사이에 유사성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그 사이의 유사성을 붙잡으면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교회 각각의 고유한 특징 속에서 교회마다 동일한 일치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에게 예수님을 만난다는 개념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교회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통해서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해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몸된 전인 교회에 대한 이해가 먼저 들어옵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호감과 사랑이 그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만듭니다.

  

흑백 명암 만으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예수님을 보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예수님을 보고자 간절히 노력하다 보면 머리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어 맞춰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그와 같이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자기 교회에 대한 좋은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호감과 열심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처음 예수님의 옷부터 보았습니다. 그 옷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시각적인 단계를 보여줍니다. 제일 먼저는 발에 끌리는 옷이었고 그 다음은 가슴이 금띠를 띠신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볼 때 주님의 옷은 발에 끌리는 옷이었고 그 다음은 가슴에 금띠를 띠신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그분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은 그분의 발이 보여주는 사역의 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슴에 금띠를 띠신 것을 본 것은 그분의 존귀하심을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영광을 이해하기 까지는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삶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점진적입니다. 하나를 보고 또 관심을 가질 때에 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를 보았지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한 내용 중 하나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에 관심을 가지면 그 다음 두 번째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번째에 관심을 가지면 세 번째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분의 얼굴도 보게 됩니다. 14절에 그분의 얼굴이 나옵니다.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와 털의 희기는 흰 양털 같고 눈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하얀색이었고 머리털도 하얀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검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같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다음에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눈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머리의 하얀 색은 그분의 성결함과 거룩함을 보여줍니다. 눈의 불꽃 같음은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것이라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외모와 외양의 모습은 주님의 눈 앞에서 속속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내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멀리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쳐다 보기만 하던 삭개오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모를 때가 있지만 주님은 그 모든 것 까지도 다 통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바로 그런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알게 된 예수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까지 본 다음에 다시 새롭게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번엔 그의 발이 보여집니다. 풀무불에 단련되어서 튼튼한 빛난 주석 같은 발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십니다. 그의 음성도 다시 이해됩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습니다. 놀라운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합니다. 그의 오른손도 보입니다. 그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습니다. 그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사자인 담임목회자를 붙들어 주고 계십니다.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 얼굴 전체는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처럼 광채가 찬란하게 나타납니다. 영광의 빛이 퍼져 나갑니다.

  

사도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계속 되면서 더욱 발전됩니다. 그분에 대한 이해는 결코 다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내가 아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한 새로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모든 고백이 전부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고백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성경말씀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체험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을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계속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는 예수님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해 보십시오. 그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얻은 영생을 감사하며 소망하는 자들이 더욱 예수님을 많이 알게 됩니다

  

이번 주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냅니다. 고난주간 동안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깨닫게 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서 교회 사이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깨닫고 그 예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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