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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충만] 48갈 2; 16-21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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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16-21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_1

  

 

  

2018. 2. 11. . 주일오전

  

 

  

*개요:  복음의 중요성, 6충만, 3관점, 6서신서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쁜 소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고 올바르게 잘 이해가 되었다면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의문은 과연 복음에 따라서 살아가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들의 삶의 모습은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과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갈라디아서는 그런 복음의 내용에 따르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복음을 따르지 않고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율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복음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가를 다시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을 따르는 삶이고 은혜를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복음이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을 따르는 것은 믿음과 은혜를 따르는 삶입니다. 반대로 율법을 따르는 삶은 행위와 심판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따르면 행위를 따져야 하고 그에 따라 심판을 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그렇게 율법을 따르고 있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다시 복음을 따르도록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율법을 따르지 말고 복음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인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에서의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율법으로는 죄인임을 깨닫는 것뿐이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에서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이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복음은 그 죄에서 깨끗하게 됨을 얻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율법과 복음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끝이 나는 때 복음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영혼이 의롭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조방식으로 검을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높은 온도에서 쇠를 녹여서 쇳물을 만듭니다. 그 다음 그 쇳물을 주물틀에 부어서 쇠막대기의 모양을 만듭니다. 그런 다음 그 쇠막대기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검을 만듭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검의 쇠는 더욱 단단해지고 더욱 강한 철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해 보면 쇳물을 주물틀에 붓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그 쇠막대기를 두드리는 정성스러운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주물틀에 있다가 나온 상태는 쇠막대기의 모습일 뿐입니다. 장인의 손을 거칠 때에 비로소 온전한 검이 됩니다. 주조방식으로 검을 만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푸집에서 빼낸 쇠의 상태는 진정한 검이 아닙니다. 그 역시 장인의 손을 거칠 때에만 진정한 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현재의 가장 여실한 상태로서 인간의 죄성과 그 죄성으로 인한 죄인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인간이 가장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도록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진정한 의를 얻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죄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의로운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모두 복음 안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데 하나님은 행위를 강조하지 않고 믿음을 중요시 여겼는데 그 혜택을 받는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해서 다시 행위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도 다른 이방인에 대해서 다시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럴 때 결국 믿음을 따르는 삶은 사라지고 행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만이 중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단지 행위로 살아가는 삶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행위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자 하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돕는 삶이지만 행위로 살아가는 삶은 겉으로만 잘 보이면 되기 때문에 굳이 마음을 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행위가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 신앙생활은 이중적이고 외식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 교회는 나가기만 하면 되지 굳이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눈을 감기만 하면 되지 굳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지는 않습니다성경은 읽기만 하면 되지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배는 어쨌든 시간만 때우기만 하면 됩니다. 봉사는 겉으로만 하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뭉치고 뭉쳐서 결국에는 외면적 그리스도인, 말그대로 종교인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행위를 강조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행위를 강조하면서 생기는 일들에 있습니다. 행위를 강조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위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것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중에서도 특별한 이방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슨 행위이든 그것을 먼저 했고 많이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항상 우월한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을 강조하면 이러한 우월한 위치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시작합니다. 또한 언제나 부족합니다보이는 것은 유지되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금방 사라지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고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세우고 격려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을 강조하기 보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반면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변화와 발전이 눈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으로 행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갖는 것은 결코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행위를 강조하지 않고 믿음을 강조할 때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이 올려퍼집니다. 이제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행하게 하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17, 18절을 보십시오.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만약 우리가 믿음을 강조하다가 행위에 부족함이 있어서 여전히 죄인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죄를 짓게 만들었는가라고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헐어 버린 것이 내가 다시 세워서 율법을 강조하고 행위를 강조하다 보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 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원리를 강조하다 보니 행위가 잘 나타나지 않을 때 그 행위가 더 잘 나타나고 그래서 가시적인 성과가 더 많이 생길 수 있도록 하려고 하다 보면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배치되고 그 길을 막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더욱 강조하고 붙들며 의지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더욱 영화롭게 하고 그것이 진정으로 의를 이루는 방법이었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 오랫동안 기다리던 평창동계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동계올림픽의 종목들을 보면 삶속에서 쉽게 접하는 종목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종목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종목들을 배우거나 연습한다는 것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런 종목들을 훈련하다가 마침내 대표선수까지 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과정들을 단순히 강제와 억압에 의해서 할 수가 있을까요? 처음은 호기심으로 해보게 되거나 강하게 권유해서 시작해볼 수는 있겠지만 하나의 종목을 꾸준히 오랜 시간 인내와 노력을 기울여서 행하게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선수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 종목 자체에 대한 애정과 열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훈련을 감당하고 경쟁을 뚫고 비로소 대표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도 행위로 될 수 없습니다. 행위를 연습하는 것은 겉모습만 만들 뿐이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하다보면 뭔가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행위를 강조하면 행위만 하게 되지만 믿음을 강조하면 믿음을 언젠가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자가 그렇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 그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보십시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말합니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고자 한다' 그 자신이 정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복음을 강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고자 했는지 그 이유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같기 때문에 이제는 그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그가 사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증거하기 위한 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한 믿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 있습니다. 그 생명의 은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위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으로 정죄된 우리들을 불러서 자신을 믿게 하시고 자신을 따르게 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라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를 담금질하십니다. 우리를 두드리고 우리를 다듬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명검이 되기 까지 오랫동안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또 의지하고 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손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믿음을 따르지 않고 행위를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폐하는 어리석은 자들일 뿐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리스도께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되지 않도록 그 은혜가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다시 한번 행위를 붙드는 삶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서 은혜를 따라가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온전한 가치를 나타내면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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