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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동행] 48갈 1; 6-12 다른 복음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의 복음

  2018_0204-111917.pdf 277.6K 0 6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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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 6-12 다른 복음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의 복음_1

  

 

  

2018. 2. 4. . 주일오전.

  

 

  

*개요:  복음의 실천, 45동행, 1적용, 6서신서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모두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성경입니다로마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따르지 못하는 교회 내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갈라디아서의 저작연대는 로마서 보다 앞섭니다. 갈라디아서는 A.D. 49년경(혹은 53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갈라디아 지역이 남갈라디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북갈라디아를 말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로마서의 저작연대와 비교해 보면 전부 앞섭니다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고린도에 방문했을 때 로마에 보내는 편지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57년이나 58년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먼저 쓰여졌고 로마서가 나중에 쓰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작연대의 순서와 상관없이 논리적인 흐름으로는 로마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는 가장 올바른 복음에 대한 설명을 보여주고 있고 갈라디아서는 그 복음에 대한 변질과 변형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오래 전 부터 가장 진실된 복음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것을 3차 전도여행 중에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정리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작연대와 상관없이 논리적인 흐름으로 로마서를 먼저 보고 갈라디아서를 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올바른 복음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얼마나 벗어나게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 시대에 복음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나누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원래의 의미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의미가 나타나게 됩니다복음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복음이 변질되는가를 오늘 말씀 속에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변질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첫 번째 복음이 변질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복음 자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인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떠나면 그 나머지는 전부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복음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떠난다면 그 다음 부터는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복음의 본질은 복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성도를 교란시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7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1:7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and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그 앞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you) are turning to a different gospel' 그리고 이어져서 말합니다.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 복음에는 복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른 '다른 복음 없나니'라는 뜻입니다. 그 다른 복음은 단지 사람들을 교란시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한 것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심각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복음이란 다른 복음(a different gospel)입니다. 그리고 이 다른 복음에는 복음이 전혀 없어서 성도를 교란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킬 뿐이었습니다. 신선한 음식이 있고 그에 반해 상한 음식, 변질된 음식이 있습니다. 상하고 변질된 것은 음식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냥 버려야만 할 뿐입니다. 상한 음식을 억지로 먹다보면 배탈이 나거나 장염이나 위염에 걸리거나 식중독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람에게는 해로운 증상입니다. 저도 예전에 한번 상한 음식을 잘못 먹고 장염에 걸려서 며칠을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니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상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의 복음일 때 가장 안전합니다. 그와 다른 복음이 되버리면 위험합니다. 신선한 복음, 진실한 복음, 올바른 복음을 듣고 따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되고 예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복음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왜 신선한 복음은 변질된 복음, 상한 복음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두 번째 복음이 변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말은 단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진실함을 나타내려고 하는 말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 속에는 왜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변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복음이 변질되는 이유는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만족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바꾸는 것입니다.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도 오히려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더 많이 포용하고 허용하고 용납하는 것으로 변화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포용주의자, 허용주의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신학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시대적, 문화적, 계층적인 차이를 없애는데 중점을 두는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나타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학적인 부분에서 복음이 변질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도 역시 복음이 변질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사회적 위치와 세상의 명예와 물질적인 권세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되고 그것이 받아들여짐으로서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각 사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지 못해도 신앙생활에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전부 '괜찮다, 잘한다'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변질되어 버립니다.

  

사실 복음은 가장 간단하고 명료하며 분명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간단하고 명료하며 분명한 것을 지켜나가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회중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또한 반대로 성도는 목회자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일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기쁘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실로 로마서에 나타나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다른 복음에 의해 밀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 가운데에서도 중심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 교회에 온전한 복음을 전했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있음을 확인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그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난 것이고 다른 복음을 따랐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지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잘못된 것을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 괜찮습니다. 애초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인사이자 또한 올바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랬는가 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값을 주고 하신 귀한 믿음의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1: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건지시려고 대속제물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수렁에서 건진 자들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가 빠져 있는 다른 복음, 거짓된 복음에서도 우리를 건져내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렇게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늘 연약해서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 중에는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즈)나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과 같은 소설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 속에서 어려움에서부터 인생을 시작하게 되지만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아가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승리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주인공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복음과 씨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 존재하고 그것에 어떠한 변질도 없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은 악하고 악한 자는 많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개입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복음으로 변질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선한 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의해서 다른 복음은 다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신실한 일군이 됩니다.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에게 이러한 자긍심과 확신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럴 때 우리 자신도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복음에 따라서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똑바로 알고 나아갈 때 온전한 복음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붙들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마지막 세 번째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변질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 번째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변질된 이유는 우리가 다른 복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붙들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뜻'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기서 사람의 뜻과 그리스도의 계시가 대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의 뜻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뜻에 치우쳤기 때문에 복음은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람의 뜻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계시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계시요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뜻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칭찬해 주시며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상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당대에 초대 교회가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 씨앗은 예수님께서 주고 가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그 씨앗의 결실을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고 그 씨앗이 주어졌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바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열매입니다. 또한 한 사람의 성도로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귀한 열매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며 그 은혜를 저버리거나 혹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계시가 아닌 사람의 계시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드는 자만이 온전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건축업자에게 어떤 유력한 사람으로부터 설계도와 자본이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그 건축하는 사람이 그 설계도와 자본을 가지고 그 유력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건물을 잘 지으면 그 건축업자는 그분로부터 칭찬과 수고비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건축업자가 설계도를 임의로 고치고 자본을 사적으로 낭비한다면 오히려 고소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것이 다른 복음이 되지 않게 하고 다른 복음을 이겨내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우리가 그럴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하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계속 함께 묵상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아름다운 계시를 잘 깨달아서 하나님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그에 따르는 나의 삶을 잘 구현하는 신실한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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