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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능력] 45롬 1; 18-25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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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1; 18-25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의 복음_1

  

 

  

2018. 1. 14. . 주일오전.

  

 

  

*개요:  복음의 의미, 52능력, 6서신서, 2분석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올해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는 가장 의미 있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하나님만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불완전하게 알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알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복음의 가치를 모르게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과 하나님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상황에서 중요한 선택과 결단과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복음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전해지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반드시 그 어떤 누군가에게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과연 누구에게 전해지는 것일까요? 또한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왜 복음이 필요한 것일까요?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이 전해지는 대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심판을 받을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집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한 이야기입니다. 약이 필요한 이유는 사실 병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진 이유도 하나님의 홍수가 임하기 때문이었고 니느웨에 요나가 보내어진 이유도 니느웨가 망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원리로 복음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복음이 주어지고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적용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발견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속에서 복음이 주어진다는 사실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19  이는 하나님을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나타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경건하고 불의하였기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을 살펴보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멸망과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은 그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를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두려움과 진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와 예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19절을 영문으로 봅니다.

  

‘since what may be known about God is plain to them’

  

‘because God has made it plain to them.’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에게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여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과 원치 않으시는 일을 알게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진노하심을 면하는 것이고 진노하심을 면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 증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보게 됩니다.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움직이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부인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 가운데에서 복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입니다.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름만 대면 그 아파트가 믿을 수 있는 건설사가 있습니다건설사 자체에 우수한 시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아파트도 믿을 수 있습니다. 건설사가 부실하고 시공능력도 부족하다면 자연히 그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만드신 복음은 가장 믿을 만한 내용이 됩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면 될 수록 그 능력에서 나온 복음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소식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는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성과 영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과 신성을 알아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의지하면 의지할 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좋은 것이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지성과 영성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별로 좋은 것이 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럴 때에 복음은 그 가치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복음이 바로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믿고 따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복음의 혜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복음을 받지 못했다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심판을 받는 자에게 구원을 받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 능력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바라는 자들이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져서 결국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복된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단지 자신들을 더욱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소식일 뿐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상태에 우리가 있지 않은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복음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스스로 지혜 있는 자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복음의 영광과 은혜에 기뻐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를 방해하고 얽매는 것은 오직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온전히 복음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에 분명히 복음은 심판 받을 죄인에게 주어졌고 그 죄인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소식 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런 기쁨 속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도 복음이 주어졌고 복음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면 사실은 우리도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마음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욕조에 들어가 있다고 할 때 분명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물이 그렇게 뜨겁지 않다면 그 이유는 다른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아주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 차가운 물을 잠그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뜨거운 물이 주는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복음의 기쁨과 감사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계속 심각하게 악화되는가를 보십시오.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썩어지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썩어질 사람의 우상으로 바뀝니다. 또한 새의 우상과 짐승의 우상과 기어 다니는 동물 우상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우상숭배인 새를 숭배하거나 짐승(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하거나 기어 다니는 동물(파충류)을 숭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과 형태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성에 근거하고 지성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우상을 보는 것 뿐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 신앙을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으로는 신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행하심을 생각하면서 그에 따를 때 그것은 비로소 신성을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만의 신앙에서 벗어날 때에 만이 더 크고 넓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복음을 믿고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그 분야가 무엇이든 자신이 지혜롭다고 하는 순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지혜가 있다고 한다면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적용된 사람의 모습에서도 그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믿음과 따라가고자 함이 없다면 결국은 스스로 주저앉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구원의 모습은 죄인이 의인 되는 것이지 결코 의인이 의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의인 됨을 감사히 여기고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그 신성에 영광을 돌릴 때에 비로소 복음을 받은 온전한 대상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벼 이삭의 최종목표는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피의 최종목표는 자기 고개를 들게 됩니다그 피의 모습을 보십시오.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가 거짓이 되고 피조물이 조물주보다 더 경배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보다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면서 그 행위를 이루는 피조물을 경배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만물에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과 창조의 능력을 거부하고 진화론의 명성을 추종하는 지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와 지구에 펼쳐진 하나님의 끝없는 능력을 부인하고 어디엔가 있을지 모른다는 미지의 생명체를 찾아다니는 시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는 거짓으로 만들고 피조물이 조물주보다 더 경배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겐 영원히 찬송할 이십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받을 수 없었던 죄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을 믿고 따를 때 오히려 그러한 우리가 의인 되었고 구원을 받은 자가 된 것을 기뻐하게 되는 분명한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기뻐함 속에서 그 기쁨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복음의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나 자신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놀라운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산을 올라가는 사람이 있고 산을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를 쳐다보고 가면 산을 올라가는 사람이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 가면 산을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에서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부러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지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도록 주어졌습니다. 그 복음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됩니다.  

  

그 복음을 잘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과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바라보는 귀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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