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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25애 1; 16-20 하나님을 어느 때에 만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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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16-20 나님을 어느 때에 만나고 있는가_1

  

 

  

2022. 2. 27. . 주일오전.

  

 

  

*개요: 애가에서의 신앙의 목표, 조직유형, 55동행, 스트레스-신뢰감

  

 

  

[]1: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19  내가 내 사랑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였도다

  

[]1: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많은 성도들이 나님을 어렵고 힘들 때에만 만나려고 고 그럴 때에만 나님을 찾습니다. 그전부터 나님을 찾고 만나고 의지면 좋겠지만 편안고 안락고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될 때에는 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힘들고 괴로울 때에만 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 때에만 나님을 찾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어느 새 여전히 힘들 때에만 나님을 찾는 일을 반복고 있습니다.

  

이 말이 어려울 때 나님을 찾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려울 때에만 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는 것은 안 좋습니다. 왜냐나님은 문제가 있을 때에만 찾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님은 어려울 때에만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나님은 기쁘고 즐거울 때에도 찾을 수 있고 그럴 때 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필요며 중요게 됩니다. 나님 안에서 목표를 이루고 그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영광과 찬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부모님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그런 위대한 부모님과의 경험이 단지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 것이라면 아쉬운 일입니다. 인생에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보다 기쁘고 즐거울 때가 많고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때 나님과 함께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이 있기 때문에 나님을 언제 만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쁘고 즐거울 때에도 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힘들고 어려웠을 때 만난 나님 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계속 누릴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안할 때에 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음에 안주지 말고 목표를 향해서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계속 배가 고파야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슬픔의 애가 속에서 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힘들고 괴로울 때 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울 때에도 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그가 괴로울 때에도 나님을 붙들었던 모습을 16,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그는 죄의 결과로 인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용사들은 사라졌고 청년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유다는 멸망했습니다. 나님 안에서 나님을 의지며 살았어야 했지만 우상숭배와 세속화에 물들었던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당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위로고 회복시켜줄 사람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수들의 승리로 인해서 자녀들이 받는 고통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에게 나님은 심판시는 분이었습니다. 여호와 나님은 이스라엘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셔서 대적이 되게 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주변 사람들에게 불결고 거부감이 되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탄식과 호소는 죄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말들입니다.

  

지만 예레미야는 그런 고백 속에서 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핵심은 단순히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두렵다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님이 옳고 내가 죄를 지었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그런 자각이 있을 때 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어렵고 힘들 때에만 나님을 의지는 것의 문제점은 그런 일들이 왜 생겼느냐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죄와 어리석음과 미련함 때문에 생겼음을 깨달을 때 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죄가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지면 미련함이 사라진 기쁘고 감사한 때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이유야 어찌됐든 무조건 이러한 슬픔을 주시는 나님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거나 혹은 단순히 슬픔이 사라지게 되기 만을 바라기만 한다면 그 이면에 있는 나님의 크신 은혜를 이해지 못게 됩니다. 그 은혜를 이해지 못니까 그 다음에 어려운 일과 괴로운 일이 끝났을 때 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졌을 때 그 다음부터 기쁨과 소망이 시작될 미래의 시간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고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우리는 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항상 어려움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 이후를 생각지 않으니 나님을 계속해서 의지는 삶의 기쁨을 알지 못게 됩니다. 슬픔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처녀들과 청년들이 사로잡혀 가는 것만 보았지만 그 기쁨을 알게 된다면 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처녀들과 청년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먼저 죄악 속에서 이루어진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19절입니다.

  

“[]1:19 내가 내 사랑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였도다

  

이전에 사랑던 자들은 환난과 심판으로 인해서 속이는 자가 되었고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을 살리기 위한 양식을 구다가 결국에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만약 의로움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었다면 이 모습은 정반대로 사랑을 받는 자들이 신뢰를 지키는 자들이 되며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양식을 구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보람과 기쁨을 느끼면서 찬양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나님을 따르고 그 영광을 위해서 살며 나님과 함께 고자 할 때 가능합니다.

  

몸이 아플 때에는 건강해지면 이런 저런 운동을 해보겠다고 다짐합니다. 바쁠 때에는 해보지 못던 것들을 한가해지면 꼭 해보겠다고 계획을 세워봅니다. 지만 막상 몸이 건강해지고 바빠지면 이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지 못합니다. 왜냐면 더 재미있는 다른 일들을 려고 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10년이 더 주어진다면 혹은 1년이 더 주어진다면 아니면 1일이 더 주어지거나 1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그럴 때 정말 해야는 일을 꼭 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금 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지금 당장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 때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다고 할 때의 의미는 그 일을 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잘 안 되는 이유는 그럴 마음이 남아있지 않고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동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지만 어떤 때에는 앞으로 려고 했던 일들을 정말 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일을 기 전에 계속 생각고 또 생각고 또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었을 때 주저지 않고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리 생각고 계속 생각지 않으면 막상 그 일이 할 수 있을 때라도 지 못합니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간구했습니다.

  

“[]1: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그는 나님께 이 상황을 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환난을 당고 있고 애가 타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였습니다. 자신의 반역이 얼마나 컸는가를 자각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칼에 아들을 빼앗기고 집에서는 죽음 같은 절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그가 간구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말해서 마음이 기쁘고 감사며 자녀를 지킬 수 있으며 집 안에 생명이 가득게 된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간구고 바라보며 추구고자 할 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 모습을 추구면서 살 때 비로소 그런 모습을 이루면서 살 수 있습니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가정의 자녀들이 생각해야 는 것은 가정폭력이 없는 삶이 아니라 가정화목의 모습이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중독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생각해야 는 것은 진정한 삶의 목표를 이루는 삶입니다.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었던 사람들이 생각해야 는 것은 목표가 있고 비전이 있는 삶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변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님은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지시기를 원십니다. 그래서 나님과 함께 나님의 나라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원십니다. 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게 되기를 원시지 않습니다. 그 에덴동산이 나님의 나라가 되어서 영원토록 이어지게 되기를 원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님을 바로 이 때에 의지여 놀라운 열매를 이루어보십시오. 그러면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님이 바로 지금 더 의미 있고 기쁘고 감사한 일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음을 생각고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나님의 은혜가 충만게 임할 것입니다. 이러한 나님의 동행심이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나님을 언제 만나는가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나님을 계속 붙들어야 한다.

  

2. 어려움 속에서 나님을 붙들 수 있을 때 평안할 속에서도 나님을 붙들 수 있다.

  

3. 죄악의 모습이 아닌 의로움의 모습으로 나님께 나아가면 많은 일들이 이루어진다.

  

4. 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음을 생각고 그 기쁨과 감사를 향해서 나아가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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