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66양선, 2관점, 5복음서, 5은혜-6결심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소감 1. 22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하시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좋게 생각하면 체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생각, 사실은 동아줄인데 믿음의 부족함이 느껴짐,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 적용적 해석, -> 감정의 괴로움이 생긴다는 자체가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인데 내 뜻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내가 해야할 일을 생각할지를 생각해야겠다,
2. 인천상륙작전 이야기가 인상적, 매일의 삶이 전쟁인데 간절히 기도하면서 실천해야겠다, 양선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지 그냥 일시적이지 말고 계속 유지해야겠다, => 적용적 해석
-> 감정의 괴로움은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하면서 지속할 수 있다,
3.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런 기도를 많이 하면서 기도했음, 내 안의 부족함을 너무 절실하게 깨달았음, 부흥회에서 간절하게 기도함, 고쳐달라고 기도함,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권면을 받음,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완치는 안 되었음, 밤새 기도를 하면서 고쳐졌음, 은혜 체험 후에는 그러한 마음을 더욱 성숙하게 됨,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나아감, => 극본적 해석
->감정의 괴로움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도하면서 해결하게 될 수 있다,
4. 아버지가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지를 보게 하심, 본질을 깨닫게 해주심을 알게 하심,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아이들의 상황에 이끌리지 말고, 원칙이나 교육목표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겠다, => 관점적 해석
-> 감정의 괴로움은 상황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능성을 생각해야 겠다,
5.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삶 속에 있는 악순환의 모습, 기독교인이 답을 해야 할텐데라는 아쉬움, 카톨릭 신자들이 늘어남 교리를 가르치는 카톨릭, 교리를 가르침, 질문하면 더 질문이 생기게 됨, 개신교에서는 이것이 답이라는 확고함이 없음, 카톨릭은 그런 부분에 답을 해줌, 그런 것이 문제라고 생각함, => 도덕적 해석
-> 감정의 괴로움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니까 선으로 나가려고 하면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I. 적용적 해석
1.본문을 통해서 알게 된 ‘원리’는 무엇입니까? / 1. 22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하시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좋게 생각하면 체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생각, 사실은 동아줄인데 믿음의 부족함이 느껴짐,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 도와달라고 기도해야겠다,
2.본문을 통해서 알게 된 ‘예화’는 무엇입니까? / 친구가 가볍게 교회를 다니는 친구였는데 ‘계시면 절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를 한다고 함, ‘그러면 안 될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있음, 그 친구는 계속 그러고 있음, /
3.본문을 통해서 알게 된 ‘방법’은 무엇입니까? /2. 인천상륙작전 이야기가 인상적, 매일의 삶이 전쟁인데 간절히 기도하면서 실천해야겠다, 양선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지 그냥 일시적이지 말고 계속 지속적, 유지해야겠다,
4.본문을 통해서 알게 된 ‘사례’는 무엇입니까? / 주변에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모습이 있음, 기도모임에 가다 보면 선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게 됨, 이렇게 경험하게 하심을 깨닫게 됨, 헌신하시는 분이 있음, 물질로 시간으로 릴레이 기도로 그분들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모습이 있음, 학교를 통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됨,
*소감 및 적용
II. 관점적 해석
1.본문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알게된 것은 무엇입니까? /
2.본문을 통해서 ‘타인’에 대해서 알게된 것은 무엇입니까? /4. 아버지가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지를 보게 하심, 본질을 깨닫게 해주심을 알게 하심,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상황에 이끌리지 말고, 원칙이나 교육목표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겠다,
3.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셔서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4.본문을 통해서 ‘사탄’에 대해서 알게된 것은 무엇입니까?
*소감 및 적용
III. 도덕적 해석
1. 본문에서 나타난 ‘선 주도’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2. 본문에서 나타난 ‘선 동참’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그런 문제를 품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3. 본문에서 나타난 ‘중립’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삶 속에 있는 악순환의 모습, 기독교인이 답을 해야 할텐데라는 아쉬움, 카톨릭 신자들이 늘어남 교리를 가르치는 카톨릭, 교리를 가르침, 질문하면 더 질문이 생기게 됨, 개신교에서는 이것이 답이라는 확고함이 없음, 카톨릭은 그런 부분에 답을 해줌, 그런 것이 문제라고 생각함,
4. 본문에서 나타난 ‘악 동참/주도’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소감 및 적용
IV. 극본적 해석
1.본문 중에서 ‘발단’에 해당하는 부분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런 기도를 많이 하면서 기도했음, 내 안의 부족함을 너무 절실하게 깨달았음, 부흥회에서 간절하게 기도함, 고쳐달라고 기도함,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권면을 받음,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완치는 안 되었음, 밤새 기도를 하면서 고쳐졌음, 은혜 체험 후에는 그러한 마음을 더욱 성숙하게 됨,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나아감,
2.본문 중에서 ‘전개’에 해당하는 부분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원치료
3.본문 중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인의지의 변화
4.본문 중에서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합력해서 선을 이루심,
*소감 및 적용
V. 분석적 해석
1.본문 속에서 가장 와닿은 ‘단어’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본문 속에서 가장 와닿은 ‘어구’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본문 속에서 가장 와닿은 ‘문장’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본문 속에서 가장 와닿은 ‘문단’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감 및 적용
VI. 통찰적 해석
1. 본문에서 ‘이해’가 있었어야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2. 본문에서 '이해'가 안 되는 ‘사건’에 해당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 본문에서 '사건' 속에서 나타난 ‘감정’에 해당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4. 본문에서 '감정' 속에서 나타난 ‘신체’에 해당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소감 및 적용
사람들은 양선을 행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선을 행하려고 하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선을 행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그 자신에게 더 취약한 감정이 있습니다. 미움이 많은 사람이 있고 분노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이 많은 사람이 있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원리 때문에 자신에게는 별로 없는 감정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이해를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가 그런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이지 감정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전혀 다른 감정이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약점인 감정이 생겨버리면 양선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양선을 행하는 일이 힘든 일이 될 때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감정으로부터 건져내어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감정의 구렁텅이에서 나올 수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의미에서 둘다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 속에서 나오는 한 아버지는 예수님과 바로 그런 관계를 갖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그는 귀신에 의해서 시달림을 받는 아들을 두었고 그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8절을 봅니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귀신은 그 아들을 잡았고 아들은 귀신에게 잡힐 때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점차 파리해져 갔습니다. 의학적으로 경련의 양상은 간질발작으로 보이지만 이 아들의 경우에는 그 근본에 귀신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런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 전혀 손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문제를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 아버지를 괴롭게 만드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아버지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있었고 절망적인 상태에 더욱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저항할 수 없이 귀신에게 잡혀버리고 그리고 더욱 파리해져갔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역시 그 상황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더욱 쓰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바로 이 아버지를 더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감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단지 귀신의 문제로만 국한시키지 말고 주변에서 이와 같은 악순환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눈여겨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삶에 이러한 패배주의와 낙심의 상황과 절망의 상태가 곳곳에 펼쳐져 있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는 그래서 괴로워하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아내와 남편이 있습니다. 친구와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 때문에 혹은 자신과 관계되어 있는 또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빠져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이 아버지가 말한 ‘선생의 제자들’이라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나면서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도 그 귀신을 쫓아내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사람들, 예수님의 일꾼들이 이런 감정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우리는 동일한 절망을 느낍니다. 지금도 이런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문제를 가지고 오기는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모습, 바로 그 ‘당신의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는 말이 우리를 부끄럽고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는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아무리 선생의 제자요, 그분의 종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주어지는 간절한 부탁과 간구는 넘쳐나지만 그 모든 요청에 일일이 대응하지 못할 때 우리들은 더욱 위축되고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좌절스런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잊고 있었던 주님을 다시 생각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할 수 없고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그 많은 일들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주님은 여기서 ‘너희가 왜 알아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왜 나를 귀찮게 만드느냐’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그리고 그 아버지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알아서 해결하지 말고, 그래서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을 수 없게 하지 말고, 그를 구세주이시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뜻에 말씀의 올바른 의미는 ‘내가 너희와 얼마나 더 오래 함께 있어야 나를 신뢰하고 나를 의지하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가를 물었을 때 나타났습니다. “28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부탁한다고 해서 그 부모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부모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이러한 종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애초에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면 할수록 더욱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의지할 때에만이 이러한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의지의 대상이 되시고 그럴 때 모든 괴로움과 힘든 감정에서부터 나올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예수님께서 이제 이 아버지를 그 절망중에서 어떻게 건져내시는가를 보십시오. 어떻게 그 깊은 절망속에서 그를 인도해 내시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구체적인 상황을 주목해서 보셨습니다. 아이 속에 있던 귀신은 예수님 앞에서 더욱 경련을 일으켰고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게 했습니다. 아이가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귀신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 귀신을 예수님도 분명히 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즉시 귀신을 물리치시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즉시 변화시켜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상황의 변화가 아버지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감정의 변화는 상황의 변화가 있어야만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감정의 변화는 오직 마음의 변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황의 변화를 통한 감정의 변화는 일어난다 하더라도 일시적이고 순간적일 뿐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마음의 변화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셨습니다. 이 아버지는 불확실한 상황속에서 근심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22절입니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의 마음의 핵심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막연함이었습니다.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그는 도와달라고는 하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서 그는 의심하며 포기하고 체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에 쌓여 있는 더할 나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진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깊은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이 아버지를 주님이 일으키십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능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는 자에게 예수님을 믿는 자를 위해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자에게 그 일을 이루십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 뜻대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올바른 말씀이 이 아버지에게 구원의 손길로 내어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는 그 능력의 말씀이 주님을 뭘 하실 수 있을지를 몰라 의심하던 이 아버지의 마음에 소망을 주었습니다.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리고 그는 그런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없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뭔가를 하셔야 내가 믿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는 주님을 붙들었고 그럴 때 괴로움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는 이겨낼 수 없었던 그 괴로운 감정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 속에서 헤매고 괴로워할 때에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건져내어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붙잡으시고 건져주십니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감정의 변화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625 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은 도움이 있었는데 바로 1950년 9월 14일에 감행된 장사상륙작전이었습니다. 이 장사상륙작전은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의 해변에 우리 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동해안 7번국도가 가장 해변에 근접하게 위치하는 곳이었고 북한군이 보급품과 전력을 조달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7번국도를 탈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목적은 인천에서의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북한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 컸습니다. 그래서 정예특수부대가 아닌772명의 학도병을 중심으로 해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3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7번국도를 탈환하고 차단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2개 연대의 치열한 공격을 받아 간신히 탈출한 소수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군인들이 사망하였습니다. 나중에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 장사상륙작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 가치는 오직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학도병들의 그 헌신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저 믿음도 없고 노력도 없고 애씀도 없는 그런 해이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 이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감정에서 벗어나 온전한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려고 하실 때에 그 도우심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마음의 변화를 우리가 온전히 받을 때 우리는 그로 인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선하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하심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괴로움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실 때에 그 손을 붙잡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그 놀라우신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선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 양선으로 나아가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결코 주님에게 붙잡혀서 선을 이루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붙들고 선을 이루게 됨을 기억하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놀라운 붙드심과 건져주심이 여러분의 삶속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