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예배 오전 11시 ‘욥기에 나타난 믿음의 소원’
묵 도 / 인도자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 송 / 1월의 찬양: 다시 주와 살게 하소서
찬 송 / 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
기 도 / 윤홍식 목사
설 교 / 18욥 3; 20-26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찬 송 / 146. 저 멀리 푸른 언덕에
봉헌,광고 / 인도자
*찬 송 / 1월의 찬양: 다시 주와 살게 하소서
*축 도 / 인도자
*주일오후예배(온라인) 오후 2시 '성경비전’
영상 설교 / 45롬 3; 19-24 율법의 심판에서 은혜의 의로우심으로 나아감2
*수요예배 오후 7시 ‘에스라 연구’ (코로나 관계로 쉽니다)
*금요예배 오후 7시 ‘에베소서 연구’ (코로나 관계로 쉽니다)
찬 송 / 135. 어저께나 오늘이나, 194. 저 하늘 거룩하신 주여
설 교 / 49엡4; 17-24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실천하는 성도들2
찬 송 / 331.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합심기도 / 다같이 (말씀, 교회, 성도, 가족, 자신)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5시 ‘’성경통독”
찬 송 / 210, 211, 212, 213, 214
성 경 / 이사야 51, 52, 53, 54, 55
2021년 1월 31일 주일 5주 <22권 - 5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원교회 / 담임목사: 윤 홍 식 목사
*2021년 표어: “큰 믿음의 소원을 갖는 성도가 되자"
*2021년 주제성구: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교회비전: 상담설교, 성경연구, 상담전도 | 사역: 소원상담센터, 소원영어센터
*선교후원: 이영희 선교사 (CCC북한선교부), 배길호 선교사 (필리핀 세부)
*오시는 길: 서울시 서초구 동광로 12길 42 (06565) TEL: 02-3476-2334 / FAX: 02-3476-2354/ 지하철4호선 총신대역2번, 7호선 이수역3번 출구, 서문여고 후문방향
〖광 고〗
-온라인 예배중계를 유튜브와 줌으로 진행합니다.
-다음 달 진행되는 말씀 범위인 시편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3: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욥]3: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욥]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욥]3: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3: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욥]3: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3: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은 첫 번째 재앙을 맞았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라’고 고백하면서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재앙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지만 여전히 욥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세 번째 시험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욥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갈등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듣고 위로해 주려고 찾아왔었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옆에서 같이 있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마음이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친구들이 무엇인가를 말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로가 되기를 바랬고 옆에 있어주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고통을 친구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3장의 첫 시작이 되는 1절입니다.
“[욥]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은 아무 말도 없던 친구들에게 자신의 입을 열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결론은 오늘 본문 20절에 나오는 것처럼 고난 당하는 자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거부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