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우리는 한달에 하나씩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새롭게 11월을 맞이해서 생각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충만’입니다. 특별히 이 11월에
충만이라는 은혜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합병으로 인해서 교회가 충만해졌고, 셋째 주에는 추수감사절로 인해서 하나님의 채우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 속에서 충만이라는 은혜를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변질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분으로만 집중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채워질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충만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채우실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시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선하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그 일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주방에 가면 칼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내는 그 칼을 들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혹은 아내가 칼을
가지고 있을 때 무서운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한번도 무섭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머니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지요.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주방에서 칼을 들고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대해서 하시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18절입니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부요하게 하십니다. 또한 흰 옷을 사게 하십니다. 그래서
입어서 단정하게 하십니다. 또한 안약을 사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눈에 발라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사서’라는 말입니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기에 우리가 확신이 흔들린다면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확신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하시는 말씀이지 우리를 이용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를 장사의 대상으로 삼으시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보십시오. ‘사서’라는 말의 의미는 나중에 밝혀지니까
지금은 더 중요한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케 함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단정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케 하심으로
이렇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는 자신이 얼마나 이러한 충만이 필요한지를 깨달아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안타깝게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채우시는
은혜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밝히 보게 합니다. 그래서 늘
궁핍함에 살지 않게 합니다. 또한 수치스러움에 떨지 않게 됩니다. 밝히
보고 사리분별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유익은 오직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궁핍한 자였는지, 그리고 벌거벗은 자였는지, 또한 앞을 보지
못했는지를 깨달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7절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고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곤고한지, 가련한 지, 가난한 지, 눈
멀었는지, 벌거벗었는지를 알 수 있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생
병원신세를 지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깨달을 때입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이 될 때 비로소 병원에 가게 되고 모든 힘을 다해서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유는 그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음을 깨달을 때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나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은혜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곤고한지, 가련한지, 가난한지, 눈멀었는지, 벌거벗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환자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병원에 가게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죄악에 빠져 그냥 심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심판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주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를 회개시키려는 것이 결코 나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국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하여 징계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의 표현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결코 정신차리지 않을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차리도록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책망받는다는 것, 징계받는다는 것,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아서 잘못을 고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결국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서 열심을 내고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원래부터 특별히 책망하거나 징계를 받지 않해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은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 잘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럴
때 더욱 주님을 붙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책망과 징계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은 더욱 사랑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우리가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아서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자꾸만 책망과 징계를 받을 수록 주님으로부터 멀어진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데, 자꾸만
책망과 징계를 하신다고 하나님을 싫어하면서 오히려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였지만 그렇게 손짓을 하면 할 수록 멀리 도망간다면 심각한 오해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까 우리가 본 ‘사서’의 의미를 찾아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까 우리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사서’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이 우리가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고 하신 이유는 그 가치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금이 정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위해 가치를 지불할 것입니다. 그것이 산다는 것이지요. 내것을 주고 그 금을 구입하는 것은 그 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금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그 금을 살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흰 옷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그 흰 옷을 살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약의 효과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안약을 살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알 때 그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케
하심은 이런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우리들은 이런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13: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13: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13: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우리는 이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팔아 주님의 은혜를 얻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더 풍성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계속되는 신앙생활 속에서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각자의 교회에서 그러한 은혜를 사모했지만, 앞으로는
이 교회에서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로 더욱 풍성하게 채워지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적용적
해석
1. 원리: 당신이 본문말씀을 통해 깨달은 신앙적 원리는 무엇입니까?
2. 예화: 그 원리를 삶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화는 무엇입니까?
3. 방법: 발견한 원리를 삶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4. 사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례는 무엇입니까?
43요4; 16-21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우시는 것_1
2012.11.11.주. 주일오전.주제설교-충만
*개요{5복음서} <3분석> [5은혜]-[6결심]
16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충만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케 하시고자 함을 깨달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신뢰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충만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는 와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채우심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승합차를 몰고 가다가 기름을 넣어야 겠다고 생각을 해서 주유소에 들렀습니다.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구
버튼을 눌렀는데 버튼이 안눌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다시 버튼을 눌러도 이상하게도 주유구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기름을 채워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주유구를 열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채워넣고자
하지만 마음 문을 열지 못한다면 혹은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것도 넣지 못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면
비어있는 상태로 그냥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대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의 주유구를 활짝 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자 하심을 받아들일 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도 정말 필요하고 잘 맞는 온전한 것입니다. 자동차에도 차의 종류에 맞는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휘발유를 넣어야
하는 차에는 휘발유를 넣어야 하고 경유를 넣어야 하는 차에는 경유를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휘발유를
넣어야 하는데 경유를 넣거나 경유를 넣어야 하는데 휘발유를 넣으면 엔진이 망가집니다. 우리 마음도 우리
마음을 만드신 하나님의 것을 넣어야 망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을 넣으면 망가지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가장 신령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애써 마음문을 열었는데 그속에 악한 것을 넣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었는지는 나중에 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그 은혜를 우리 마음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이 채우는 것을 받으면 다른
것을 찾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목말라서 또 다른 그 무엇인가를 찾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솟아나는 기쁨이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그 영원한 샘물로 인해서 그는 영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것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그것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이제 여러분들만 원하면 됩니다. 그것을 원하신다면 됐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됩니다.
이 놀라운 것으로 채움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삶을 가지고 나아와야 합니다. 그냥 그릇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두손을 벌려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쁜 옷과 멋있는 옷을 입고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
놀라운 것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삶을 가지고 나아와야 합니다. 현재 있는 그 삶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와야
합니다. 아무런 꾸밈없이 아무런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혜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여자에게는 자신만 그 마르지 않는 생명샘물을 받게 되기를 원하였지만, 갑자기 남편을 불러 오라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과 처지와 형편이 때로는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은밀한 것도 있을 텐데 그런 숨기고 싶은 부분을 여지없이 드러내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남편이 없다고 해버렸습니다.
그러면 될 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원래 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정말
숨기고 싶었던 그 개인적인 상황을 예수님은 여지없이 드러내셨습니다.
“17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어쩌면 그런 개인적인 부분은 수치스러운 부분이고 이미 그일에 대해서 거짓말까지 했던 터이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부분에 대해서 그를 지지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삶을 가지고 나아오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진심으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쓰고 나아오는 한 진실된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실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그 삶을 주님께 숨기지 않기만을 바라십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19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훨씬 더 나아졌지 않습니까? 물장사꾼에서 선지자로
상승했습니다. 그 계기는 자신의 삶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자신을
알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선지자임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정일뿐입니다. 아직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을 보면 우리는 아까 보았던 하나님이 진정으로 채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정말 우리를 채우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대상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상황이나 조건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무엇을 얻게 되면 놀라운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하도 커서 속에서부터 솟아나오는 샘물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21절입니다.
“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여자는 이제 선지자로 생각하는 예수님께 그 생명생물은 장소나 환경에 의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샘물을 얻고는 싶지만 자꾸만 특정 장소, 특정
환경이 이루어져야만 그런 생명샘물이 솟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 속 깊은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도 예수님을 물장수가 아니라 선지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환경의 변화를 고집하게
되면 될 수록 더욱 그 환경으로 인해 괴로움 당하게 되지만 그런 생각의 악순환 조차도 말하지 않는다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인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이러한 마음속 깊은 의문에 대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실된 대답은 바로 방금 우리가 읽은 내용에 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그렇게 찾던 생명샘물의 본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샘물, 마시는 자마다 속에서 솟아나 영생하게 되는 샘물의 구체적인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버지’입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장소의 공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대상의 공급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일 때 우리는 무한한 공급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우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속에서부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샘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아버지께 예배한다는 것, 아버지로
채워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늘 보이지 않는 아버지로 채워지기 보다는 장소나 환경으로 채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더 시각적이고 청각적이고 감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혀 시각적이지도 않고 청각적이지도 않고 감각적이지도 않은 오직 생각과 생각 속에서 깨달아야만 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우리
속에 비로소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눈과 들리지 않아도 듣게 되는 귀와 만질 수 없어도 만질 수 있는 감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 신앙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향했고 거룩과 성결을 향해 살아갔으며 희생과 봉사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에 대한 위협과 비난 속에서 담대히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며 그 영원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우리 속에 거하심으로 얻게 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보다 더 큰 존재로 드러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이 샘물은 실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샘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채워주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의 예배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채워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문을 열고 아버지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실 연료로 말하자면 주유구에 넣는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엔진에 넣는 연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의 문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때에 비로소 들어와 우리의 모든 생각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을 여러분의 삶속에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명샘물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목마른 삶이 아니라 날마다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삶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