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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롬12; 4-8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가르친다_1
2025. 5. 18. 주. 주일오전.
찬양: 378. 내 선한 목자, 154. 생명의 주여 면류관,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개요: 스승의 주일,
[롬]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가정을 돕는 하나의 주체인 가르치는 자의 의미를 말씀 가운데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정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태어나면 온 가족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언제 더 커지는가 하면 그 자녀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유치원을 다니면서 착한 행동을 배울 때입니다. 그럴 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선생님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을 때 자녀가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을 때 신앙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의 성장은 단지 교회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이 되고 장년이 되어서도 교회에서 좋은 가르치는 자를 만났을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어지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삶 속에서 계속 의지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배우게 되면 이 세상에서의 신앙 생활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생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은 계속 이어져서 내세에까지 이어집니다. 한번 배운 것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말 중요한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깨닫게 되기 위해서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 삶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새로운 생활이었습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하는 일을 교회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적용도는 특별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각자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를 때 예언이며 믿음의 분수대로 하고 섬기는 일의 은사는 섬기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 은혜의 표현은 각자의 재능과 기술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만약 그런 은사 속에 섬기는 일을 맡았다면 섬기는 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었다면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략되어 있는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에서 가르치는 일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다음 절까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롬]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복되는 여러 가지 표현의 구조로 보면 맨 마지막에 ‘긍휼을 베푸는 자가 즐거움으로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자는 어떤 자세로 그 일을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의 자세는 바로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자세와 태도로 여길 때 그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루어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좀더 올라가서 5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대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그래서 그 은사대로 활동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사대로 활동하는 것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바로 한 몸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6절부터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한 몸이 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 절에 나온 대로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은사가 달라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대로 예언을 하면서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가 가르치는 일로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그 가르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일을 하도록 은사를 받은 것이고 그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에 받았던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회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된다는 것과 신앙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본질적으로 틀립니다. 가르침을 통한 결실과 열매도 다릅니다. 신앙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되고 가르치는 일을 통한 결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 해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자신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되는 과정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교대를 들어간 것도 아니고 임용고시를 치르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어떤 과정을 통과한 것도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평신도 교사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모습도 생각해 보십시오.
신학교를 나오고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학위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통해서 준비를 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가르치는 자는 애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신학과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 신학과 성경을 공부해서 성직자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직업으로 선택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소명으로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가르치는 자는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동일합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면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면서 주의 몸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가 주의 몸을 섬기면서 가르치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단지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길 뿐이었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을 할 때 자신의 역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가르친 것은 하나였는데 그것은 둘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둘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넷이 되어 있고 내가 가르친 것은 다섯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가요?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붙들어서 그들의 깨닫는 것이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열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신앙 안에서는 놀랍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기한 일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인 하나님이 놀라우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됩니다. 가르치는 자는 오직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한 몸이 되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 배우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열심히 배우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하나님의 몸으로 세우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은사가 다 다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다양합니다. 가르치는 자가 가르치는 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듯이 우리 모두가 자기의 맡은 일로 하나님의 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