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6개월간 우리는 2011년 전반기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번 6월 한달에는 교회의 의미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근본이 무엇이며 교회의 시작이 무엇이며 교회의 과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무엇이 교회의 시작이었고 무엇이 교회의 과정이 되는지를 보았습니다. 이제 6월 마지막 주에 이르러서 교회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마지막 시간으로 교회의 결과가 무엇인지 성경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앙고백의 근본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과정이었다면 그로 인해서 나타난 교회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다른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바닥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라는 부르심으로 저와 아내와 저의 큰 딸이 집에서 모여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하나님의 은혜로 지하 교회장소를 임대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 성도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0명 내외로 모일때가 있었고 얼마 후엔 20명 내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적게 모일 때 우리가 했던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렸고 그리고 교회의 목표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시간이 흘러 12년이 지났고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우리 교인은 애 어른 다 합해서 한 5,60명 정도 됩니다. 앞으로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100명이 넘기도 하겠지요. 100명이 넘으면 좀 빠르게 식구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200명 300명 400명 이렇게 늘어나겠지요.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못하면 우리 다음에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1대, 2대, 3대 진행되는 것입니다. 당대에 다 되는 것이 아니구요. 그렇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무슨 일을 할까요? 100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100명이 되면 어떤 일을 우리가 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교회가 하고 있을 일을 보여줍니다. 숫자가 적을 때에는 이런 모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어나고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게 될 때에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이 모습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교회의 모습을 함께 살펴 봅시다.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100명을 넘어설 때 아니 그 이전에도 그렇겠지만 교회의 최종적인 결과적인 모습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최종적으로 나타내는 결과적인 모습입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런 일들을 이제 다시 생각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의 미래의 모습 속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100명을 넘어가고 난 다음에 사도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때를 바라고 있는데 100명이 넘은 교회들은 정말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있을까요? 신기하게도 그렇습니다. 그 교회가 이상한 교회가 아니라면 100명이 넘는 교회는 정말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데 그 가르침을 사도적인 권위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에서 전도를 하면서 이렇게 교회를 소개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한번 와보세요.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뚝뚝 떨어져요.” 어쩌면 정말 그 목사님에게서 그렇게 은혜가 뚝뚝 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렇게 목사님을 생각하는 마음 속에서 저는 생각합니다. ‘아,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있구나’ 하지만 때로 어떤 교인을 만나서 다니는 교회가 어디냐고 담임목사님 성함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아,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있지 못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지 않으시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셨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이부분은 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으면 부담감이 적었을 텐데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해 놓으니 꼼짝없이 사도의 가르침에 순종해야만 할 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하셨을까요?
오늘날 ‘사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가르침,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르침, 친구의 가르침, 가족의 가르침, 혹은 자신의 가르침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이 시대에 올바르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세상의 가르침을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가르침을 극복합니다. 가족의 가르침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경쟁하는 상대는 바로 자신의 가르침입니다. 이 시대는 정보제공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진보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골라 들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가장 새로운 성경공부 교재를 접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최신의 성경번역본을 읽을 수 있고 언제든지 신앙생활에 대한 여러가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이 생겨납니다. 내가 보기엔 옳지 않고 내가 보기엔 옳고 내가 보기엔 맞고 내가 보기엔 맞지 않는 자신만의 기준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보기에 옳은 곳에 가고 내가 보기에 옳은 것을 접하며 내가 보기에 옳은 것을 행하다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이 기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곳에 가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접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할 때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기준에 따른 것은 전부 우상숭배라고 말하십니다. 이것을 구별해 주는 사람이 사도입니다. 하나님께 향해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인 것입니다. 어떤 이익이나 욕심에 이끌리지 않고 가장 공정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사도이고 그 가르침을 받을 때에만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나아가게 만듭니다. 자신의 가르침은 자신의 하고 싶은 것을 이루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지만 사도의 가르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하게 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하나님과 가까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계속 하면 절대로 하나님과 가까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도의 가르침을 싫어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 의사의 가르침을 싫어하더라도, 때로 교사의 가르침을 싫어하더라도, 때로 경찰의 가르침을 싫어하더라도, 때로 변호사의 가르침을 싫어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병이 낫고 그래야 공부를 잘하고 그래야 처벌을 면하고 그래야 재판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의 가르침이 무엇이길래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일까요? 사도들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까? 정말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방금 읽은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예루살렘 교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 일은 서로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 모인 많은 사람들 속에는 제자들이 모였던 것보다 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속에도 어부와 세리와 정치가와 운동권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에 모인 더 많은 사람들 속에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그 속에는 종이나 자유자나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혈연과 지연과 계급별로 서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로 혈연과 지연과 계급별로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서로 교제를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서로 어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저 교제를 나누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인사만 나누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떡을 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것 처럼 말이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루었던 참된 사랑의 공동체를 교회 속에서 더 확장해서 이루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도록 서로 떡을 떼며 삶을 나누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독려하고 권면합니다. 혼자서 하는 은밀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지를 볼 때에 비로소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 사람이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한 때임을 알게 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내어서 주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면 그 시각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떡을 떼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그 때에 신앙은 더욱 온전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서로 떡을 떼는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갑니다. 예루살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서로 떡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한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들이 기도하면서 성전에 모였습니다. 기도하면서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교회가 이루어는 온전한 모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최종적인 결과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럴 때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성도들을 칭찬하며 더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해봅니다. 우리가 그냥 명수만 채워달라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처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떡을 떼면서 더욱 기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결과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속에 여러분 각자의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은 이러한 교회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 여러분이 움직이게 되는 것, 여러분이 행하게 되는 것에 의해서 여러분은 점차 각자가 원하고 기다리고 바라던 바에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러한 삶 가운데 있습니다. 의사의 말을 따르면 병이 낫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신 것을 잘 행할 때, 우리는 육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문제도 함께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장사를 한 여자 성도가 목사를 찾아와 가계가 안된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장사가 안 되도록 하는가 하며 비웃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 성도는 십일조나 헌금 등을 빠짐없이 했고 주일성수도 착실히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그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장사가 안되고 사람들이 비웃으니 감사합니다." 여성도는 의아한 듯 목사를 보더니 혹시 기도를 잘못한 것 아닌가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돌아가서 감사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몇 일 후에 얼음판에서 미끄러졌다며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났습니다. 그때도 목사는 "주님, 팔이 부러졌으니 감사합니다."라고 했고 그녀는 목사에게 이제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저주의 기도같아서 팔 부러진 것을 감사하면 다음 번에는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시무룩해져서 돌아갔다. 얼마 있다가 지난번 보다 훨씬 나빠진 얼굴로 와서는 가게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목사는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게를 치우고 업종을 바꿔 다른 장사를 시작했던 그녀가 하루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목사를 찾아왔는데 그녀의 얘기인 즉 장사가 더 잘되는 것은 물론이요,그전에 자신이 하던 그 점포자리가 도시계획에 걸려 헐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정부에서 보상금을 주지만 점포 값에 비하면 형편없을 것이었지만 그녀는 일찍 점포를 팔았기에 손해를 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하고 그제사 그녀는 감사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지 못했노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교제를 하며 떡을 떼고 그리고 기도를 할 때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했고 그일을 통해 더욱 좋은 상황이 이루어짐을 지금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도하심이 교회 속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을 때 나타납니다. 그 뜻에 따를 때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은혜를 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서로 교제하면서 서로 떡을 떼면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삶속에 채우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 6개월의 삶속에서 한결같이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가오는 후반기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욱 사도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서로 교제하게 되고 떡을 떼게 되어서 더욱 기도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