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계획] 1창 3;16-17 창조명령을 이루며 살지 못하는 이유1창 3;16-17 창조명령을 이루며 살지 못하는 이유_1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은 새해에 우리에게 세 가지 창조의 명령을 주십니다. 그것은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꼭 새해뿐만 아니라 일년 열두 달 우리에게 항상 주시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명령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는 창조의 명령은 더욱 우리의 삶에 본질적이며 근본적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창조의 명령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이 명령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여러분은 이 창조의 명령 속에서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여러분은 충만해야 합니까, 정복해야 합니까, 다스려야 합니까? 나름대로 노력하는 수준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며 영역이 다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충만해야 하거나, 혹은 정복해야 하거나, 혹은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항상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에 충만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물을 경험하며 지식수준과 경험수준을 넓혀갑니다. 작년에 태어난 우리 둘째 딸은 열심히 아빠의 책상을 탐구합니다. 때로는 발꿈치를 들고 때로는 애를 쓰며 의자에 오르기도 하면서 열심히 새로운 세계를 확장합니다. 그런 본능적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우리 아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취학전 연령을 지낸 다음에 들어가는 학교생활은 날마다 새로운 정복거리로 넘쳐납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열심히 새로운 과제와 새로운 지식을 정복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러한 노력과 분투는 다만 문명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개한 사회에서도 동일한 노력과 사투가 일어납니다. 얼마 전 TV에서 방영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성인식 장면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새로운 도전을 정복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전혀 공부할 필요도 없고 전혀 애쓸 필요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살아갈 것 같은 미개사회에서도 여전히 정복해야 하는 필요와 그에 대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성인식을 치르고 한 사람의 성인이 되기 위해서 다 자란 청년들은 소를 뛰어넘어야만 했습니다. 소를 뛰어넘지 못하면 성인이 아니었고 그러면 결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소를 뛰어넘기 위해서 소를 정복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중학교를 마치기 위해서, 초등학교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들은 노력합니다. 정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정복의 대상은 자신의 학업이며, 자신의 한계이고, 자신의 연약함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을 때 그들은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 열매를 누리게 됩니다. 모든 교육과정을 졸업하고 나서 더 이상 배움의 과정을 지속할 필요가 없게 되면 무엇을 하게 될까요? 물론 그런 다음에 다시 충만하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문제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기도 하지만 연령적으로 볼 때 학교를 다 마치면 주로 하는 일이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잘 다스리게 되면 될수록 더욱 삶이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된 다음에 하는 일이 직업을 갖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름의 직업을 갖게 됩니다. 주부도 하나의 직업으로 보고 ‘전업주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직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래야 돈을 벌고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럴 때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역시 맞닥뜨리는 일이 바로 ‘다스리는 일’입니다. 잘 다스리면 잘 다스릴수록 열매가 많아지고 그로 인한 보람과 유익이 커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러한 일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충만하거나, 정복하거나, 다스리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더 이상 충만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정복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원래 이 창조명령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일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충만하고 싶지만 충만하지 못합니다. 정복하려고 하지만 잘 안됩니다. 다스리려고 하지만 좀처럼 다스려지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우리는 왜 그 명령을 잘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평생을 충만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가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들에게 생긴 문제를 보여줍니다. 16절입니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는 잉태의 고통이 커져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원래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서 살아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도리어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런 삶을 살게 하셨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도 역시 비슷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해야만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땅을 정복하기가 어려워졌고 다스리기가 어려워져서 계속 해서 수고하고 수고해야만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다시 정복당하고 다시 다스림을 잃어버려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져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아담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어떻게 하다가 아담은 이렇게 힘든 삶을 살게 된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와가 죄를 지었고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은 구체적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죄값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죄값으로 인해서 더이상 손쉽게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지은 죄가 무엇이었나요?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심한 벌을 받았나요? 여기에 대해 아담에게 하신 죄에 대한 내용은 하와에게 하시는 말씀과 동일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일하게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는 이러하였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이와 동일하게 특별하게 언급하지는 않으셨지만 하와의 죄도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와에게 이르시되 네가 뱀의 말을 듣고 내가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하와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는 못하였지만 이미 아담으로부터 그 선악과에 대한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선악과에 대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뱀이 처음에 선악과에 대해서 말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주신 죄의 값은 여자인 하와에게는 충만하기가 어려워지는 고통이 따른 것이며, 겸하여 남자에게 다스림까지 받게 하셨고 남자인 아담에게는 땅을 정복하기가 어려운 고통이 따른 것이며, 겸하여 땅을 다스리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은 죄의 의미가 무엇이길래 이러한 죄값을 받게 된 것일까요? 죄의 내용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이지만 그속에 담긴 죄의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아담과 하와가 그냥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천천히 죽게 되었으며 천천히 죽는 자가 되면서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된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 명령을 전혀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냥 죽어 버렸을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제 충만하지도 못하고 정복하지도 못하고 다스리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살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전혀 그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전보다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선악과를 따먹은 행동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단지 뱀이 유혹해서가 아닙니다. 뱀은 선악과를 생각하게 하고 유혹을 부추켰을 뿐입니다. 하와가 최종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그 열매가 하나님처럼 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어떻게 유혹했는지 아시나요? 창세기 3장 5절을 보십시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섭을 피하고 하나님께 의존을 버리고 하나님의 경험을 뛰어 넘어서 자유롭게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자신이 선악과를 봐도 정말 그렇게 선악을 알게 해줄 것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것입니다. 아담은 왜 하와의 말을 들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와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와처럼 하나님 없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혹시 더이상 충만하지도 않고 정복하지도 않고 다스리지 않아도 살 수 있지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힘들어한 아담은 그 명령을 버릴 수 있고 그 명령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와나 아담이나 동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아담에게 더 나은 선한 동기나 목적이 있어서 선악과를 먹는데 동참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를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충만해야 하는데 충만하지 못합니다. 정복해야 하는데 정복하지 못합니다. 다스려야 하는데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짓는 죄가 무엇인가요?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죄가 아닌가요? 물론 십계명이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죄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치심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바로 우리가 지은 죄의 증거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고 수치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전에 조직폭력배에 몸담았다가 그 세계를 떠나왔다는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이야기를 할 때 몹시 힘들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죄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는 일들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명령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 죄를 짓고 또 그 죄를 반복해서 수행하느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만하는, 정복하는, 다스리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범죄함 속에서 우리는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고 우리 자신이 삶의 주관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버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서 죄책감과 수치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수치심으로 인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피해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값을 주십니다. 그들은 즉시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어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창조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죄값은 그들이 힘들게 창조명령을 수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보여줍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그들에게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충만하기를, 어려움 속에서 정복하기를, 두려움 속에서 다스리기를 그들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불러서 더욱 힘들게 하나님 안에서 그 명령을 이루며 살게 하십니다. 그들 자신이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비록 죄가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멀게 하였고 그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창조명령을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속에서 하나님은 다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때로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고통과 좌절과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죄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짓는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비록 그 모든 힘듦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붙들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안에서 좀더 능력있게 좀더 강건하게 좀더 은혜롭게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동일하게 바로 이것을 원하십니다. 지난 주 우리는 송구영신예배를 통해 올해의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기도제목을 놓고 저도 일년동안 기도할 것이기에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보았습니다. 어떤 것은 정말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기도제목이었고 또 어떤 것은 안타깝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멀어지려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 몇몇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멀어지려는 기도제목을 보면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소원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낳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 멀어지려는 기도제목이 올 한해 더욱더 많은 죄를 만들 것입니다. 더 많은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 것입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죄값이 찾아올 것입니다. 결국 그 죄값으로 인해 몇몇 성도들의 삶이 더 힘들어 질 것을 생각하면 제 가슴은 메어질 것 같습니다. 때로 저의 둘째 딸 지인이를 차에 태우다 보면 안전벨트를 싫어하고 도망가고 싶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지인이는 카시트에 안전벨트를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는 많이 커서 밖에 나가면 엄마 아빠를 버려두고 혼자 막 다닙니다. 그러면 쫓아가서 잡아옵니다. 더 자유롭게 더 활기차게 더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지만 부모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틀림없이 다치고 아프고 고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모로부터 떠나지 않으려고 할 때까지 그를 붙들어야만 합니다. 어떤 소원을 가져도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해로운 소원이 있고 하나님을 슬프게 만드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고 비록 하나님을 멀리 하고 싶어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서 죽이시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죄를 지었다고 죽이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루속히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지 않고 그 죄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충만하지 않으려고 하고, 정복하지 않으려고 하고, 다스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명령이지만 지키고 싶지가 않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불러서 그들에게 죄값을 주며 다시 그들이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또다시 올 한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 보내심을 깨달으며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해서 창조의 명령을 다시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찾지 않음으로 인해 힘들고 어렵고 하기 싫을 때도 있겠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때도 있겠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일을 함으로써 더욱 주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더욱 이러한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죄로 인해 약해지지 말고 불신앙으로 인해 실족하지 말고 이 명령을 수행하는 한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힘을 다해 충만하고 정복하며 다스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전의 죄를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다시한번 온전한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1역사서} <1적용> <3분석> [2분류]~[0복음],[5-1계획] 1.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2. 하와는 아담에게, 아담은 하와에게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댓가를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각 영역에서 죄를 지을 때에 그에 맞는 댓가를 주시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4.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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