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정] 1창 3; 8-13 책임감당을 통해 가족이 된다Loading the player...
1창 3; 8-13 책임감당을 통해 가족이 된다_1
2024. 2. 11.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가족의 의미, #53희생 [창]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2월달 우리는 설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좋은 시간을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신앙적으로도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설 명절에 어떻게 제사를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면 요즘에는 어떻게 하면 가족 갈등을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부부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자녀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된 것입니다. 아마 같이 있다 보니 갈등을 겪을 기회도 많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족갈등을 신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각 가정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가족에게 죄를 다스려야 한다, 선을 행해야 한다’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도 역시 배울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로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보여주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반대로 교훈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전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책임감당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해서 점검하시는 장면은 다음 구절부터 나타납니다. “[창]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들은 선악과를 먹은 뒤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나무 사이에 숨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며 그를 찾으셨습니다. 어쩌면 부부문제에 있어서 혹은 가정문제에서 하나님께 드러나거나 혹은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모르실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과 반응에 긴밀하게 감찰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가정을 이루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정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가정을 사랑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아담이 대답한 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시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책임 전가였습니다. 그럴 때 책임 전가를 하지 않고 책임 감당을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미 선악과를 먹고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는 오직 그 문제에 대해서 은혜를 따르기 보다는 악을 더 선택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대답속에서 자신의 근원적인 악의 모습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창]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대한 대답 속에서 벗었음을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였고 하나님은 그 이유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인 것을 아시고 그것을 자기 스스로 말하도록 하게 하셨습니다. 그럴 때 그의 대답은 그냥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열매를 주었기 때문에 먹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행한 죄악의 결과를 하와의 잘못으로 돌리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하와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도 책임을 돌리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아담이 보여준 책임전가의 모습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죄의 결과에 더해서 책임전가까지 하는 더 큰 악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책임전가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죄에 대해서 회개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계속해서 죄를 짓겠다는 자기합리와와 정당화에 해당하는 더욱 악한 죄의 모습이었습니다.
부부가 종종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그 책임을 배우자에게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듯이 그러한 책임전가는 좋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열매를 누가 주든지 먹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그 열매가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였기 때문에 먹었던 것처럼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을 동일하게 가졌기 때문에 먹었던 것이지 단순히 하와가 먹으라고 해서 먹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 자신의 잘못이었는데 그것을 하와 잘못으로 그리고 하나님 잘못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전가는 아담 뿐만 아닙니다. 하와도 역시 책임전가를 하였습니다. 뱀이 자신을 유혹해서 그렇게 선악과를 먹었다고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 자신도 선악과를 먹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뱀을 거부하거나 다스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책임전가가 부부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남편의 잘못은 아내 탓이고 아내의 잘못은 남편 탓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회개하기 보다는 서로의 탓만 하면서 더욱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그 갈등이 하나님께도 이어져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 신앙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문제가 나중에는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부부가 갈등을 일으키면 그로 인해서 자녀들이 피해를 입고 가족 전체가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부가 가정에서 이와 같은 책임전가를 생각한다면 더 넓게는 가정 밖에서도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사회 속에서 책임전가에만 열을 내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진정한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 탓만 하다가 끝이 나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책임전가의 모습이 얼마나 큰 죄악의 표현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책임전가를 하면 할수록 원래의 죄는 회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죄악을 부르게 됩니다. 자신의 죄도 남아있고 상대방의 죄도 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한 심판도 커지는 것입니다. 아담도 자신의 죄와 책임전가의 죄가 합쳐져서 심판을 받은 것이고 하와도 역시 자신의 죄와 책임전가의 죄가 합쳐져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관계가 깨진다는 것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것은 그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악을 알게 되고 그 악으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아서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책임전가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이것은 단순히 수고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을 보여줍니다. 책임전가는 결국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고통을 만들 뿐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은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더욱 크게 만들 뿐입니다. 하와에게도 이것은 동일했습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임신하는 고통이 커진 것은 그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고 뱀에게 돌린 책임전가는 남편에게서 계속해서 다스림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이 다스림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책임전가가 아니라 책임감당입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할 때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한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라도 오히려 그 죄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세주가 되셨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책임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희생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면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부부는 책임을 전가하려고 할 때에는 관계가 악화되지만 책임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관계가 발전합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더 큰 선한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부부관계 뿐만이 아닙니다. 가족관계에서도 책임감당 속에서 가족의 의미가 더욱 커져갑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기 때문에 신뢰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부와 가족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연합을 깨우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할 때 힘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족장시기에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책임전가 하려고 했다면 그들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겠지만 그 속에서 책임감당을 하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사라는 만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책임을 감당하려고 할 때 정말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설 명절을 보내면서 앞으로의 가정의 모습에 대해서 책임감당의 모습을 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