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고전]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고전]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12: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가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면
그 변화의 시작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부터 변화를 시작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까지 변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의 변화만을 강조하고 주장한다면 결코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1907년도에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님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때의 회개가 시발점이 되어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도 울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회개했고 그로 인해서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했다면 결코 회개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자기가 먼저 회개하고자 했을 때에 서로가 자신의 마음을 열고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한 몸되기를
간절히 바랄 때에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자신도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오히려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성도를 돌아보고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2: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합니다. 또한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귀한 것으로 입혀주고 오히려 아름답게 치장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귀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하지만 귓볼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귓볼은 벌을 받을 때 잡아당길 때에나 사용되지 그 외에는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귓볼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되지 않습니까? 귀걸이를
바로 그 귓볼에다 하니 말입니다. 손톱도 보십시오. 그냥
하얗기만 한 부위에 온갖 장식을 하면서 아름답게 꾸며집니다. 오히려 그 아름답지 않음이 더욱 아름다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약해 보이는 것이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약한 부위를 보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신경과 돌봄이 이루어집니다. 위가 약한 사람은 늘 위를 보호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법들을 추구합니다. 간이
약한 사람, 장이 약한 사람, 등등 신체기관중 어느 하나가
약하고 문제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부분에 더욱 신경을 쓰고 돌봅니다. 그 이유는 그 기관이 그냥
떼어버릴 수 없고 문제증상자체를 단순히 잊어버릴 수 없는 우리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원리로 우리는 교회안의 지체들에 대한 하나님의 몸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안좋으면 성격이 안좋은 대로, 문제가
많으면 문제가 많은 대로, 형편이 어려우면 형편이 어려운대로,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이 부족한 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더욱 사랑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한 몸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점차 강하여져서 연약한 부분이 튼튼해지고 교회의 몸을 잘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다들 보았다고 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도마를 배척하고
비판하지 않고 기다려주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을 때 그는 자신이 영적 소경이었고 존재하는
사물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믿음이 연약한 자는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소경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와 함께 주변의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자신을 기다려주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우리만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자신들의 기준과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구별하고 스스로를
한계지우면서 살아가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사람들도 점차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변화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변화의 고통을 경험할 때 함께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광의 기쁨을 경험할 때 함께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느낍니다. 지체의 각부분은 각자의 의지와 성향에 상관없이 함께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능력의 근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손이 아플 때 발이 그 고통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발이 아플 때 손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오른쪽
손 대신에 왼쪽 손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오른 발 대신에 왼 발이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온몸은
서로 고통과 즐거움을 공유하면서 한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일을 행하려고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그 영향을 받고 변화됩니다.
어느 도시에 대형 화재가 났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사거리에 두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이고 다른 한 명은 앉은뱅이였습니다. 뜨거운 불길이 그들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급히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번져오는 불길을
보면서 두려워 떨기만 할 뿐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둘 다 자기 힘으로는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둘 다 사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눈이 밝아 어디로 피해야 할지를 알게 된 앉은뱅이가 시각장애인에게 자기를 업게
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자기 등에 업힌 앉은뱅이가 보고 말해 준 방향으로 피하여 둘 다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몸일 때 결국 같이 삽니다. 같이 사는 몸임을 깨달을 때 협력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힘을 합치고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합하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연합할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뻐하심 속에서 사람들을 이 모습 저 모습으로 세우십니다.
28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과 사역은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능력자와
치유자와 협력자와 지도자와 방언기도자 등입니다. 이러한 직분과 사역은 사람들이 투표로 세운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필요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 뜻가운데 부르심을
통해서 세우십니다. 그 직분자와 사역자들이 잘 못할 때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이지 그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그 직분과 사역을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새롭게 사람들이 그 직분에 해당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세우거나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형제교회나 신사도운동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군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 높아지거나 혹은 낮아지거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
세상에서 잘 실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생명을 잘 구원할 수 있도록, 구원받은 자들이 잘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일군들이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잘 이루어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이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교사로 섬기는 일이나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회에 소속만 두고 있거나 손님처럼 다니거나 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교회의 일원이 되고 담당이 되고 멤버가 될 때에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행하는 놀라운 봉사입니다.
이렇게 행하려고 할 때에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을 통한 방해는 결코 그 일을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욕심과 탐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고전]12: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왜 나만 돕는 것과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가질
때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나도 사도가 되고 나도 선지자가 되고 나도 교사가 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나도 병을 고치려고 하고 나도 방언을
말하려고 하고 나도 통역하려고 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욕심이 되고 질투가 되고 결국에는 실족함이 됩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개 한 마리가 고깃덩어리를 입에 물고 강을 건너고 있던 중 우연히 강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에 비친 모습이 자신인지도 모르고 자기보다 더 큰 고깃덩어리를 입에 물고 있는 개를 발견하고는
그 개의 고깃덩어리를 빼앗기 위해서 입을 벌렸다가 자신의 입에 물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그만 강물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활용하려고 할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남들처럼 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행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사람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함께
그 은혜에 동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칭찬받은 귀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
지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